◈ 최양업 신부님의 생애

최양업신부님의 생애

성 미카엘회 회장 송 바울라 정자 2019. 7. 23. 20:38

최양업신부의 생애

 

▲ 가톨릭대 개교 160주년 기념 성화.

예수 그리스도의 왼쪽에 김대건 신부, 오른쪽에 최양업 신부가 있다.

(사진 출처 = 서울대교구 보도자료)

 

   최양업(崔良業) 토마스는 182131일에 충청도 홍주, 즉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에서 순교 성인 아버지 최경환 또는 영환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351122일에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사제인 모방(Maubant)() 베드로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조선말을 배우기도 전에 방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사업부터 시작하였다.

 

   나 신부는 3명의 충청도 출신 소년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 최양업은 183626일에,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는 314일에, 김대건은 711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라틴어를 배웠다. 1836123, 3명의 신학생은 서울을 출발하여 28일에 변문에 도착하였고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183767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조선 신학생들은 본래 말레이시아 패낭 신학교에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 당시의 형편상 파리 외방 선교회 극동 대표부에 임시로 설치된 신학교에서 1842년 초까지 5년간 공부하였다.

 

   그 당시 마카오 대표부의 책임자인 르그레주아 신부와 부책임자인 리부아 신부 그리고 중국이나 조선에 부임하는 길에 마카오 대표부에서 대기하던 베르뇌 신부, 메스트르 신부 등 선교사들이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새 소년은 마카오에 도착한 지 2개월 만에 그곳에서 일어난 민란 때문에 필리핀 마닐라로 피난했다가 그해 겨울에 마카오로 돌아왔다.

 

   183811월에 동창 최방제가 사망하였다. 이때 최양업과 김대건은 벌써 라틴어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183946일 마카오에 민란이 또다시 일어나 그들은 마닐라로 다시 피신했다가 그해 11월에 마카오로 돌아왔다. 조선 신학생들은 마닐라에 피신해 있는 동안에 도미니코회 원장의 초청으로 마닐라 근처 룰롬보이 농장에서 데플레슈 신부의 지도로 학업을 계속하였다.

 

   르그레주아 신부는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 선교회 극동 대표부의 책임자 신부였다. 조선 신학생 3명이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대표부에 임시로 신학교를 설치하여 실제로 그들의 교장이요, 사감이요, 교수로서 모든 것을 자상하게 돌보았다.

 

   그는 초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소 주교를 위시하여 조선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는 1842년 초에 파리 외방 선교회 본부 신학교 학장으로 전임되었다.

 

   리부아 신부는 파리 외방 선교회 극동 대표부 부책임자로서 조선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1842년 르그레주아 신부 후임으로 극동 대표부의 책임자 신부가 되었다. 그는 1866년 파리 외방 선교회 본부 신학교 학장으로 전임되었다.

 

   1842년에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에 프랑스 정부는 군함 2척을 중국 해안에 파견하였다. 하나는 에리곤호였고, 또 하나는 파보리트호였다. 184211월에 최양업은 브뤼니에르 신부를 따라서 페레올 신부가 있는 몽고와 만주의 국경 지방 촌락인 소팔가자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소팔가자는 만주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우촌 중의 하나였다. 18441215일 이전에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정의 신학 과정을 모두 끝내고 고 주교로부터 삭발례를 비롯하여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들은 아직 만 24세가 안 되어 사제 서품을 받지 못하였다.

 

   한편 소팔가자에 남아 있던 최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고 주교의 지시를 기다리면서 18461월과 18477, 1848년 초와 1849년에도 해로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최양업 부제는 상해에서 1849415일 사백주일에 중국 강남 대목구장인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4912월에 최 신부는 다행히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도착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1845년 귀국길에 오른 지 실로 5년여 만에야 조선에 입국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거의 매년 스승 신부들께 도합 19통의 편지를 보냈다.

 

   1845년에 최 신부는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말레이시아 패낭에 있는 신학교로 보내는 데 성공하였다. 1859년에는 최 신부의 관할 구역에서만 예비자가 천 명이 넘어 복음화 사업이 절정에 달했다. 그때 공교롭게도 185912월부터 18608월까지 경신박해가 일어났다.

 

   1861년에 조선 대목구 신자수는 만835명이었다. 최 신부는 건강한 편이었으나 그의 관할 구역은 5개 도에 두루 산재해 있었고 공소만도 127개나 되어 1년간 7천여 리를 두루 다녀야 했다. 그는 그처럼 엄청난 공소 순회 외에도 교우들을 위해 책을 저술하는 일을 맡았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을 위해 주요한 교리를 4.4조의 가사로 지어서 보급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천주가사(天主歌辭).

 

최 신부는 1859년 여름 다블뤼 주교를 도와 신자들의 일과 기도서 한국 교회 최초의 공식 교리서인 한문본 성교요리문답과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완성했다. 한글본 성교요리문답1934년에 천주교 요리 문답이 나오기까지 공식 교리서로 쓰였다. 한글본 천주성교공과1972가톨릭 기도서가 출간되기까지 110년간 사용됐다

 

   최양업 신부는 12년 동안 유일한 조선인 사제로서 조선 8도 중 5개도에 산재해 있는 127개나 되는 교우촌을 담당하였다. 박해를 피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산골짜기에 적게는 두어 명에서 많게는 50명 정도씩 흩어져 사는 근 6천 명이나 되는 신자들에게 모든 성사를 집전하느라 해마다 7천 리씩 걸어 다녔다. 그 결과로 탈진하여 만 40세의 한창 나이로 연풍성지 근처인 문경에서 병사하여 배론성지에 묻혔다.

 

 

 

18511015일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돼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워서 열 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해 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1858103일 오두재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사실 사본문답(四本問答, 세례고해견진성체성사) 전체를 완벽하게 익혀서 세례 준비를 마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사본문답을 전부 배우자면 몇 해가 걸려야 하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교리 공부를 해도 사본문답을 다 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1857915일 불무골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조선 사람들은 쉽사리 합리적인 순리를 수긍하고 이성과 정의의 바른길을 잘 파악합니다. 만일 한마음 한뜻으로 백성에게 동일한 이론을 가르치고 계몽한다면 백성들은 쉽게 동의할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계몽을 받아 이에 정통한 자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출처]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26) 한글 교리서와 기도서 보급에 앞장서다 |작성자 바슬

[출처]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생애|작성자 바다의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