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의 존재
커다란 고난
“나의 딸아, 정화의 장소인 연옥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곳에서 받는 고통은 심연의 지옥과 같으나, 곧 구원받을 줄 아는 곳이다. 영혼들은 성부를 기다리기만 하는 황량한 갈망을 품고 있다. 나의 딸아, 뜨거운 불의 고통을 견디게 해주는 이 마음의 갈망은 기다리는 모든 영혼의 존재를 품는 위대한 것임을 명심하여라.”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5. 3. 29
기도
“나의 딸아, 속죄의 기도를 계속하여라. 참고 기도하여라. 너희의 기도하는 시간에 연옥의 많은 영혼이 풀려날 것이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5. 4. 5
SOCIETY
“나의 딸아, 네게 연옥의 말을 전할 것을 원하였다. 많은 하늘의 군대는 정화의 장소를 지나 천국으로 오는 영혼들로 채워지고 있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3. 4. 14
LOOK
“나의 딸아,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연옥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너희는 지상에서의 매 순간 속죄와 고난으로 자신을 정화하는 길을 찾으려 할 것이다. 지상에서의 시간을 얼마 되지 않으나, 장막을 넘으면 시간은 영원하고 끝이 없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4. 5. 22
1881년에 처음 발간된 찰스 아르미뇽(Charles Arminjon) 신부의 “The End of the Present World and the Mysteries of the Future”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 마카베오하 12:45
연옥의 존재는 성경과 유대교 및 교회의 이어오는 전통에 의해 명백하게 증명된다. 마카베오서에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거룩하고, 유익한 사상이라고 쓰여있다. 그들이 세상에 살면서 자신을 더럽힌 죄악과 불완전함에서 해방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ut a peccatis solvantur (그들의 죄에서 해방되게 하소서). 자신의 소명을 수행함에 칭찬받는 것만을 사랑하고, 허영심과 자기 만족감에 굴복한, 게으르고 주제넘은 설교자들을 가리켜 성 바오로는 저들이 먼저 불의 시련을 받은 후에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sic quasi per ignem (이처럼 불을 통하리라). (고린도1서 15:32 참조) 성 그레고리는 죄를 지은 영혼이 생전에 충분히 속죄하지 않으면 불의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ab igne baptizabuntur (그들은 불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두 번의 세례를 받게 된다고 말한다. 처음 세례는 우리를 지상의 교회에 들이는데 필요한 것이고, 두 번째 세례는 우리를 하늘에 있는 교회에 들이는데 필요하다.
성 키릴로스와 성 토마스에 따르면 연옥의 불은 지옥의 불과 똑같다고 하였다. 그 강도는 같지만 끝날 시한이 있다는 점만 다르다. 마지막으로 거룩한 전례에서는 연옥은 무서운 심연이며, 영혼이 고뇌와 잔혹한 희망을 품고 사는 곳이며, 끊임없이 타오르는 영악한 불의 영향을 받는 곳이며, 신의 정의의 숨결로 밝혀지는 화로이며, 그 힘은 신의 가장 정의롭고 가장 무서운 징벌의 수단이라고 가르친다: Dies irae, dies ilia ... Lacrymosa dies ilia, qua resurget ex favilla judicandus homo reus (진노의 날, 바로 그날 ... 눈물 흘릴 그 날, 잿더미로부터 일어나 심판받을 죄인들).
미사 경본에서 교회는 이 영혼들이 빛의 장소(locum lucis)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간청한다. 연옥의 영혼들이 깜깜하고, 빈틈이 없어 뚫을 수 없는 짙은 암흑에 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교회는 연옥 영혼이 시원한 피난처(locum refrigerii)를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 이로써 연옥 영혼들이 참을 수 없는 불타는 고통에 빠져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반복해서 교회는 연옥 영혼들이 평화의 장소(locum pacis)를 찾도록 기도한다. 연옥 영혼들이 그곳에서 두려움과 표현할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간단한 묘사만으로 우리 모두는 공포에 빠져든다. 이 사로잡힌 영혼들을 위해 어서 빨리 위안의 기도를 전하자. 저들이 받는 위안이 얼마나 큰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저들의 눈이 부드러운 빛을 보듯 생기를 얻는 것은 아직 아니며, 천사들이 저들 주위의 불꽃을 상쾌한 이슬로 바꾸려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들에게는 감미로운 보물이 된다. 이 보물은 그 자체로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의기소침한 영혼들을 일으켜 세우며, 가장 우울하고 낙담한 영혼의 얼굴에 평온의 빛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하다. 지상의 가장 비참하고 궁핍한 이들이 가진 모든 환난과 고통이 가득 찬 잔을 비웠을 때 그들에게 남겨진 좋은 것을 연옥 영혼들도 지니게 된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연옥 영혼들은 가장 깊은 곳에서조차 가장 절대적인 안전의 약속을 믿으며 모든 불확실성과 불안감을 지우고 가장 높은 곳에서의 희망을 지니게 된다: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디모데오 2, 4:8)
이 연옥 영혼들은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 성 토마스는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대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는데, 이 확신은 너무나 위안이 되어 자신의 고통을 잊게 한다. 애초에 이 영혼들은 알고 있다. 믿음을 저버린 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도 없으며, 자기 죄를 미워하지도 않고, 어떠한 선한 일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저들은 하느님을 사랑할 줄 알며,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고 더 이상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내적 자각을 깨닫게 되었다. 더구나 저들은 대죄 상태에서 죽은 영혼은 숨을 거두는 순간 지체없이 지옥에 던져진다는 것을 믿음의 확신으로 알고 있다. 저들은 부유한 나날들을 지내다가 한순간에 지옥에 떨어진다. (욥기 21:13)
절망의 상태에 빠지지 않고, 악마의 얼굴을 대면하지 않으며, 악마의 저주와 모독을 듣지 않는 영혼들이라면, 그 영혼들은 대죄의 상태에 있지 않으며, 은총을 간직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또 그들이 성 바오로의 믿음을 외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더 이상 죄악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더 이상 신과 자신을 분리하지 마십시오: Certus sum enim!(나는 당신을 위해 확신합니다) 내 운명에 더 이상 두려운 의심은 없습니다. 아! 다 끝났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 나는 하느님의 입에서 나의 구원의 돌이킬 수 없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나는 언젠가 천국의 문이 열려 나의 의로운 입성을 기다리며, 하늘과 땅과 권력과 권세가 함께 나를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떼어 놓고 영원한 왕관을 빼앗을 힘이 없음을 다시는 의심하지 않을 것을 압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8-39)
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이 영혼을 외칠 것이다: 내 고통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나의 징벌의 폭력성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 징벌과 이 고난은 나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내 안에 있는 그분의 사랑의 불을 끄기에는 터무니없이 약하기만 하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로마서 8:35) 오! 내 약점은 이제 더 이상 분노의 분출이나, 조급함, 투덜거림 같은 것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뜻과 즐거움을 받아들이고, 나를 정죄하는 손을 감사하며, 나의 모든 수난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이 고통들이 내 영혼을 짓밟거나 불안하게 하거나, 괴롭게 하거나 비통에 빠지게 할 수 없다: Non contristabit justum quidquid ei acciderit (착하게 살면 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 잠언 12:21) 나는 이 고통들이 피조물의 선익을 위해 사랑과 공평으로 모든 것을 마련하시는 신의 섭리에 의해 맡겨지고 조정된다는 것을 안다.
덧붙이자면 만약 내가 지금부터 절대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복종하여야 할 절대자의 의지에 반하여 고통을 즐기는 것이 허락된다면, 나는 천국의 기쁨에 이르는 이 고통을 더 좋아할 것이다. 내 소원과 열망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 원하시는 대로, 그리고 원하는 때에”라는 하나의 문구로 요약된다. 오 내 마음속의 하느님, 나의 보물이시며 나의 전부이신 이여, 주께서 친히 내게 내려오시어 주님의 손으로 감사할 줄 모르고 불성실한 이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시다니!
오, 살을 깊이 베여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잔을 비우소서! 주님의 영예와 주님의 정의에만 귀를 기울이시고, 완전히 충족될 때까지 저의 투정이나 신음에 귀 기울이지 마시옵소서.
가여운 영혼들! 그들은 오직 하나의 열망, 하나의 불타는 욕망, 하나의 소원만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아름다움과 자비와 무한한 사랑의 모든 권능과 힘으로 그들을 부르시어 영혼들을 부르는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모든 장애물을 부수도록 이끄소서.
오, 그들이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기꺼이 자신들을 삼키는 불꽃을 반기며, 자신들이 구원될 행복한 날을 앞당기기 위해, 고통에 고통을, 고난에 고난을 달게 축적하면서 서로 경쟁하게 될 것이다. 이 영혼들에는 고통, 흠결, 결함이 겹쳐진 죄악의 흔적이 남아 있어 신성한 실체와 결합할 수 없다. 그들의 불완전함, 그들이 스스로 더럽히게 한 사소한 결점이 자신들의 내면의 눈을 멀게 하고 불구로 만들었다. 그 영혼들이 완전하게 정화되기 전에 천국의 밝고 눈부신 빛이 병들고 심약해진 연옥 영혼들의 눈에 비춰진다면, 그들은 어두운 심연에서 갑자기 밝은 빛을 만났을 때 느끼는 것보다 천 배는 더 고통스럽고 불타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신성하고 순수한 빛으로 그 영혼들을 당신의 형상으로 즉시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이 빛은 너무 밝고 눈부셔서 저 영혼들을 꿰뚫을 수가 없다. 하늘의 빛은 저 영혼들의 여전히 더러운 지상의 찌꺼기와 수렁의 잔해에 가로막힐 것이다.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져 인간의 나머지 잔재인 불완전함을 태우고, 검은 석탄 같은 상태에서 영롱한 수정의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 과정은 매우 오묘하여, 그림자와 어둠의 모든 찌꺼기를 제거하여야만 하며, 바닥이나 둑이 없는 강처럼 그들 안에 넘쳐 흐르며 언젠가는 그들을 채울 신성한 영광의 빛과 광채를 어떠한 장애물 없이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배척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끔찍한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의사는 그를 치료하기 위해 집게든지 불이든지 가리지 않고 사용할 것이다. 의사는 보기에도 무서운 도구로 환자의 뼈와 골수까지 조사할 것이다. 의사는 그 병의 가장 근본적인 곳을 집중 치료할 것이다. 환자는 고통에 몸부림치겠지만, 모든 수술과 치료가 끝나면, 그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병이 사라지고, 다시 아름다움과 젊음과 활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아! 다시 태어난 환자는 불평이나 분노하기는커녕, 자신에게 천 가지 고통을 안겨다 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자신에게 건강과 생명이라는 가장 값진 선물을 준 의사에게 감사나 축복을 표현하기에 인간의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마음은 연옥의 영혼도 똑같을 것이다. 그들도 정화의 고난을 통해 자신의 영혼에 묻은 얼룩과 오물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기쁨에 몸을 떤다. 정화의 불꽃의 영향으로 자신의 뒤틀린 영혼의 형체가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게 된다. 성 토마스는 정화의 불꽃은 그 힘을 공급하는 영혼의 결점과 불완전성을 다 태우면 그 강렬함이 소멸한다고 말하고 있다. 정화의 불에서 벗어난 영혼들이 크기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장벽으로 여전히 분리되어 있다. 오!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새로운 이동 수단을 맞는다. 자신의 몸에서 날개가 자라는 것을 알게 되며, 이제 곧 천국으로 날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들은 이미 구원의 새벽을 맞고 있다. 오! 그들은 아직 약속의 땅에 도달하지 못하였지만, 모세처럼 이미 마음속에 천국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불빛과 상쾌한 해안을 느끼고, 그 향기와 달콤한 냄새가 나는 산들바람을 실컷 들이마시고 있다. 이 순간 그들은 그리 멀지 않은 지평선에서 그들의 구원의 새벽이 떠오르는 것을 본다. 이제 영원한 안식의 땅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Requies de labore. (휴식을 취하다) 이 영혼들은 이제는 그들의 마음속에 완전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을 너무도 강렬하게 사랑하기에 주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이 용해되고 소멸되더라도 그 사랑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신성한 사랑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사람은 마치 이 땅에 혼자 있으며,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광과 수치에 무관심하다. 그는 모든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석쇠든 집게든 어떤 고문을 받더라도 마치 다른 몸으로 받는 듯 더 이상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세상의 그 어떤 감미로운 것들도 더 이상 매력도 없고 맛도 없다. 그는 일곱 번 단련을 거친 금이 더 이상 녹슬지 않듯이 악한 집착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이런 것들은 지상에서도 영혼을 단단하게 단련시킬 때 나타나는 신성한 사랑의 열매이다.”
이제 내가 말하는 영혼들에게 신성한 사랑이 더 큰 힘을 다해 작용한다. 육신에서 분리되었기에 모든 인간적인 위안은 사라졌으며, 천 번의 순교를 당해야 하는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하느님께 의지하게 되며, 자신들에게 부족한 것을 하느님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의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는 자신이 견디는 고통으로 자신이 얻을 이익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일하거나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들에게는 밤이 찾아온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요한 9:4) 사람이 하늘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스스로 속죄하고 공덕을 쌓는 노력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죽음과 함께 끝이 난다. 육신에서 벗어나 다른 삶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인간은 영원한 삶의 선고를 받는다.
운명이 불변으로 정해지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선택권도 없으며, 이 때문에 다시 하느님의 법정 앞에 설 일도 없게 된다. 연옥의 영혼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공적을 쌓을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공적을 잃을 일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유롭고 완전히 무관심한 사랑으로 고통받는 것은 달콤한 기쁨이다.
가장 잔혹한 고통 속에서 행복한 상태라는 이 독특한 조합은 우리의 둔한 마음으로는 이해하기 힘이 든다. 하지만 순교자들을 보라. 테레사, 루치안, 그리고 수많은 십자가의 연인들. 그들 대부분은 슬픔과 고난과 가장 처참한 영적 황폐를 겪는 중에 하느님 안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사람은 일종의 천국을 미리 경험하고 가장 달콤하고 짜릿한 기쁨과 환희가 그의 마음속에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연옥의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한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과 끊임없이 만나고 관계를 유지하는 하늘과 땅의 교회들로부터 사랑받는다. 가톨릭교회는 자녀들에게 자비를 호소하고, 중재를 통해 밤낮으로 저들의 청원과 도움을 아낌없이 베풀고 있다. 매 순간 선한 천사들은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에서 흘려보내는 천상의 이슬을 저들에게 내려준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대화로 서로를 위로하며 지낸다.
측량할 수 없는 간극이 연옥 영혼들과 지상에 있는 그의 친구들 사이에 있지만, 이 간극이 저들을 갈라놓을 수는 없다.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가 나사로의 동정에 기대어 헛되이 찾았던 그 물방울을 매 순간 자유롭게 그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다. (루가 16:24 참조)
성 요한은 어느 순간 놀라운 환영을 보았다. 그는 어느 성전을 보았고, 이 성전의 성소에 있는 제단을 보았으며, 이 제단 아래에 수많은 영혼이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묵시록 6:9 참조) 어느 해석가가 말했듯이 이 영혼들은 제단 앞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제단 앞에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중보기도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성만찬의 열매를 나눌 수 있다. 그들은 제단 아래에 있고, 기다리다 체념하기도 한다. 비록 저들이 고통 중에 있지만 우리는 기꺼이 그들의 입술에 이 열매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
***
가톨릭교회는 연옥의 위치에 대해 어떠한 선언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박사들과 교부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했으며, 우리는 어느 쪽이든 정통성이나 참된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성 토마스, 성 보나벤투라, 성 오거스틴은 연옥은 지구의 중심에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로 교회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성가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주여, 지옥과 깊은 구덩이의 고통으로 떨어진 신자들의 영혼을 구원해 주소서.”
마찬가지로 요한묵시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두루마리를 펴고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는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고 또 땅 아래에도 없었습니다.” (요한묵시록 5:3) 성 요한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 신비한 두루마리를 열어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불려온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중 땅 밑에 사람들을 언급함으로써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 어두운 깊은 땅 밑에 잠시 갇힌 의로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지 않은가? 다른 곳에서 시라크(Sirach)의 말 중에 “내가 땅 아랫부분으로 내려가 잠자는 자들을 돌보리니, 구원의 소망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학자들은 저자가 이 구절에서 구약의 지도자들과 성인들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곳인 림보를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은 성 토마스와 성 보나벤투라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설명이다.
사실 구약시대의 지도자들과 성인들이 모든 죄를 정화받고, 아담이 우리 인류에게 전한 원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 땅에서 완전히 지워지는 그때까지 땅 아래를 거처로 삼았다면, 죄의 정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영혼의 정화 장소로 땅의 더욱 깊숙한 곳이 더 적절해 보인다: Inferiores partes terrae (지구의 낮은 부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증언은 이 견해에 더 많은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의 서신 XCIX, ad Evodium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셨을 때, 림보뿐 아니라 연옥에도 가셨다고 언급하였다. 사도행전에 언급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연옥에 갇힌 영혼 중 일부를 데리고 나오셨다: Solutis doloribus inferni (지옥의 고통을 끊으셨다).
연옥의 위치에 관한 두 번째 의견은 성 빅토르와 성 그레고리우스의 대화에 언급된다. 이들은 연옥은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죽은 영혼들이 지상에서, 그리고 그들이 가장 자주 죄를 지은 곳에서 자신의 죄를 정화한다고 말한다.
신성한 신학은 첫째, 연옥은 땅의 중심에 위치한 정해진 경계가 있는 고정된 장소이며 대다수의 영혼이 자신을 더럽힌 잘못을 정죄하기 위하여 가는 곳이라는 교리를 확립함으로써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을 조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옥은 이 한 곳에 국한되지 않는다. 죄의 중대성 때문이든 신의 특별한 섭리를 통한 것이든, 연옥에서 머물지 않고 그들이 죄를 지은 곳에서 벌을 받는 영혼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위대한 신학자들로부터 나온 이런 해석은 많은 성인에게서 행해진 수많은 발현과 계시를 통해 설명되고 확증되었는데, 이중 몇몇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진리의 표식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의 교리를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성 그레고리우스가 그의 대화 중에 인용한 모든 계시 중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계시를 선택해 설명하겠다.
시토(Citeaux)의 연대기에는 로데즈(Rodez)지역의 순례자가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다가 폭풍우를 만나 시칠리아와 가까운 선의 항구에 입항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곳에서 순례자는 자신의 나라인 프랑스의 종교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궁금해하고, 클뤼니(Cluny) 수도원과 오딜론(Abbot Odilon) 수도원장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하는 독실한 은둔자를 만나게 된다. 순례자는 성실히 대답해 주었으며, 그에게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물었다. 그 운둔자는 대답하기를,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분화구가 있다. 그 꼭대기를 자주 보게 되는데, 가끔 연기와 화염의 구름을 내뿜곤 한다. 그곳에서 나는 악마가 죄를 지은 영혼을 잡아 무서운 심연으로 내던져 한동안 영혼들을 괴롭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하루는 악마들의 대화를 몰래 엿들었는데, 어떤 영혼들이 그들의 수중에서 빠져나갔다고 불평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기도와 희생으로 이 영혼들의 구원을 돕는 경건한 사람들을 비난하였다.
그들은 특히나 오딜론 수도원장과 그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런 이유로 귀국하거든 클뤼니 수도원에 찾아가 원장 및 수도사에게 이 불쌍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두 배로 늘려줄 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부탁한다.” 귀국한 순례자는 그의 부탁대로 수도원을 찾았다. 경건한 사람인 오딜론 수도원장은 모든 것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깨달음을 청하였고, 자신이 속한 모든 수도원에서 매년 11월 2일을 세상을 떠난 모든 신자를 기리는 날로 정하였다. 이것이 위령의 날의 기원이다.
“나의 자녀들아,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너희의 참회와 시련을 바치는 것을 잊지 말아라. 아주 작은 수의 이들만 천국으로 직접 들어가며, 장막 너머로 온 많은 이들이 연옥에서 정화의 시간을 보내야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너희의 도움밖에 의지할 데가 없구나. 너희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그러면 다가올 사순절에 그들을 위해 많은 은총이 내려질 것이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예수님, 1978. 2. 1
천국으로 인도
“연옥은 추방에 대한 상실감과 큰 고통이 있는 곳이지만, 마지막에 천국으로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마음이 편한 곳이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예수님, 1976. 8. 5
커다란 고난
“나의 딸아, 정화의 장소인 연옥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곳에서 받는 고통은 심연의 지옥과 같으나, 곧 구원받을 줄 아는 곳이다. 영혼들은 성부를 기다리기만 하는 황량한 갈망을 품고 있다. 나의 딸아, 뜨거운 불의 고통을 견디게 해주는 이 마음의 갈망은 기다리는 모든 영혼의 존재를 품는 위대한 것임을 명심하여라.”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5. 3. 29
번역: 성미카엘회 회장 송 바울라 정자
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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