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① 성 알폰수스가 말하는 좋은 고해 사제...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세상 곳곳에 있는 성자의 집인 성교회로 데려 가야 한다. 아이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영혼을 정화하는 좋은 습관을 배워야 한다. 성자로부터 축복을 받은 지상의 선한 목자들아, 너희는 이 어린 영혼들을 신앙 안에서 양육하여야 한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5. 11. 20
The New Theological Movement, 2011. 8. 1 기사:
성 알폰수스는 사제가 훌륭한 고해자가 되기 위해 누구보다 탁월하게 수행해야 하는 네 가지 역할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제는 아버지이자 의사, 교사 이자 판사가 되어야 합니다. 고해성사의 의무를 다하려면 사제는 물론 거룩해야 하지만 개인적인 거룩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고해 신부는 도덕 신학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녀 소화 데레사가 거룩하지만 배우지 않은 고해신부보다 배웠지만 거룩하지 않은 고해신부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도덕 신학 박사의 축일을 맞아, 우리는 성 알폰수스가 고해사제들에게 주는 조언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사제들이 고해사제들의 수호 성인이 지은 저작물들을 읽는 새로운 열정을 찾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고해신부들에게 한 성 알폰수스의 조언 요약
1. 고해성사를 듣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사제는 자신이 들은 모든 고해성사에 대해 하느님께 설명해야 합니다. 거룩함과 배움이 없으면 사제는 자신의 영혼과 참회자의 영혼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런 사제라면 고해성사를 듣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2. 지식: 사제는 고해성사를 잘 듣기 위해 배워야 하며, 이는 특히 교사로서의 역할에 적용됩니다. 고해신부는 단순히 도덕 신학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응용도덕과 매뉴얼에서 논의되는 사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사제가 도덕 신학의 고전적 저작물(그중에서도 성 알폰수스의 저작물이 가장 우선)을 참고하지 않고 고해성사를 듣는 것은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참회자의 영혼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중대한 추정행위가 됩니다.
3. 자비와 굳건함: 고해성사는 자비로 충만해야 하며, 이는 그가 거룩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제는 모든 사람(성자나 죄인, 지혜로운 사람이나 무지한 사람,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을 친절하게 맞이하고 개인적인 이익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조언해야 합니다. 여성의 고백을 들을 때는 불순함이 개입할 위험이 있으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4. 용기: 고해사제는 언제, 어떻게 사면을 거부할 지(즉, 달리할 지) 알아야 합니다. 고해사제가 너무 엄격하거나 너무 느슨하면 엄청난 저주의 위험에 자신을 노출하게 됩니다. 어느 고해사제가 너무 가혹하게 보속을 주면 죄를 짓게 되는 것처럼, 사면을 받을 마음이 없는 회개자에게 사면을 베푸는 사제도 반드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고해사제가 고해자를 대하는 엄격함이 클수록, 특히 순결에 반하는 공식적 죄의 위험성이 문제일 때, 사제는 고해자의 거룩함을 더욱 촉진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고해사제는 영혼의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성 알폰수스의 "사제의 존엄성과 의무(The Dignity and Duties of the Priest)"에서 발췌
사제가 고백을 듣는 것으로 인해 노출되는 위험:
위대한 교황 성 비오 5세는 “우리에게 적합한 고해사제를 주면 확실히 교회 전체가 개혁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고해사제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고해사제의 직무가 매우 어렵고 위험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며, 그 어려움과 위험성 때문에 트렌트 공의회는 고해사제를 천사들조차 두려워해야 할 직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 로렌스 유스티아누스는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설명을 하느님께 드리는 책임을 맡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성 그레고리우스는 영혼을 향하여 저지르는 잘못보다 더 위험한 잘못은 없다고 말합니다. 고해사제의 잘못으로 영혼이 잃어버렸다면 하느님께서 그에게 그 영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실 것은 확실합니다. […] 따라서 성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고해사제는 회개하는 사람의 수만큼의 영혼에 대해 하느님께 설명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 위대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고, 이후 오직 영혼을 하느님께 인도하려는 열망으로 그 직무에 헌신하는 훌륭한 사제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동기, 일시적인 이익, 자존심, 또는 때때로 필요한 지식 없이 고해성사를 듣는 일을 맡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잘 듣기 위해 필요한 지식
성 로렌스 유스티아누스는 “영혼을 살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은 은총과 적지 않은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를 듣고자 하는 사람은 광범위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 신학이 쉽다고 생각하지만, 거슨(Gerson)은 도덕 신학이 모든 과학 중에서 가장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했습니다. “영혼을 인도하는 것은 예술 중의 예술이다.” 성 그레고리 나지안젠(St. Gregory Nazianzen)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은 나에게 모든 과학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레(St. Francis de Sales)는 또한 고해사제의 직분이 모든 직분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려운 직분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의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도덕 신학은 많은 다른 학문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하며, 방대한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장 어려운 점은 발생하는 사건의 다양한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특정 상황을 포함하는 사례를 판결하는 원칙은 다른 상황을 포함하는 또 다른 사례의 해결책으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 신학자들의 저서를 읽는 것을 경멸하며, 고해성사를 듣기 위해서는 도덕 신학의 일반 원칙만 알면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원칙만으로도 개별 사례를 해결할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나는 대답합니다: 모든 사례는 원칙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원칙만을 적용하여 해결책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큰 사례도 있습니다. 도덕주의자들은 이런 일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많은 특정 사례를 해결할 수 있는 원칙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
따라서 고해성사를 듣기 위해서는 큰 학문과 또한 큰 신중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신중함 없는 지식으로는 고해신부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그의 사역이 유익하기보다는 해로울 것입니다.
고해 사제가 가져야 할 자비와 결의
성스러움은 여전히 더 필요합니다. 이는 고해 사제가 그의 사역을 수행하는 데 있어 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 로렌스 유스티아누스는 '오직 위대한 성인만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영혼을 돌보는 일에 종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해 사제는 가난한 사람, 무지한 사람, 악한 사람 등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큰 자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제는 경건한 사람들의 고해만을 듣다가, 가난한 농부가 죄로 가득한 양심을 고해하면, 사제는 참을성 없이 그의 고해를 사면하기 보다는 비난하며 돌려보내기도 합니다. […] 죄인이 고해성사에 올 때, 그가 더 버림받은 상태일수록, [좋은 고해 사제들은] 그를 돕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하며, 그를 대하는 자비도 더 커져야 합니다. 성 빅토르 휴고는 '사제들은 범죄를 심판하고 벌하기 위해 임명된 판사가 아니라, 마치 질병을 치유하는 의사와 같은 판사로 임명된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죄인을 훈계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비참한 상태와 그가 직면한 지옥의 위험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항상 자비심으로 훈계해야 하며, 그가 신의 자비에 대한 신뢰를 갖도록 격려해야 하며, 그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고해 사제가 보속을 연기해야 할 경우에도, 그는 참회자를 부드럽게 돌려보내야 합니다. 돌아올 날짜를 정해주고, 그동안 보속을 준비하기 위해 실천해야 할 방법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죄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가혹함과 비난으로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
각각의 고해성사를 들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 할당에 대하여
그러나 더러는 우리가 이런 식으로 죄인들의 고해성사를 듣는다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그때문에 고해를 기다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버려두게 될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많은 고해를 불완전하게 듣는 것보다 한 번 뿐일지라도 고해를 잘 듣는 것이 낫다고 말해 줍니다. 그러나 가장 적절한 대답은, 고해 사제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하느님께 설명할 필요가 없고, 오직 그가 고해를 듣기 시작한 사람에 대해서만 설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해 사제에게는 인내가 요구됩니다
고해 사제는 큰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의 고해를 들을 때 큰 인내가 요구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제들이 이 고해성사를 듣고 영혼을 잃었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우리는 고해성사에서 어린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을 대해야 하며, 그들의 유혹과 종종 그들의 타락에 대한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그들도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보속을 거부할 때
참회자들을 바로잡고 필요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 사면을 거부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는 그들의 지위나 권력, 고해 사제가 입을 수 있는 손실이나 피해, 또는 그에게 가해질 수 있는 무분별함이나 무지에 대한 비난을 고려하지 않고서도 말입니다. 성신께서 이르시기를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불의를 뿌리 뽑을 충분한 힘이 없다면 재판관이 되기를 요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수도회의 신부가 고해 성사에서 사면을 거부한 어느 사제의 고해 성사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면을 거부한 사제는 그때 고해자에게서 거만하고 교만한 소리로 “가세요! 당신은 짐승입니다”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해결책은 없습니다. 고해 사제는 그러한 불편과 모욕은 감수해야 합니다. 참회자가 자신이 해야 할 보속을 하지 않거나, 죄악을 계속 반복하거나, 죄를 지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 있기 때문에, 고해 사제는 사면을 거부하거나 연기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고해 사제는 참회자를 구원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 죄인들과 죄를 지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무 가혹하거나 너무 느슨할 경우의 위험성
이 주제에 대해 말하기 전에, 고해 사제는 참회자를 지나치게 관대하게 대하는 것만큼이나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함으로써 자신을 저주의 위험에 빠뜨린다는 점을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 보나벤투르는 지나친 방종은 억측을 낳고 지나친 엄격함은 절망으로 이어진다로 말하였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관대함으로 인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은 큰 혼란을 일으키며, 저는 심지어 가장 큰 혼란을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방탕한 자들이 이러한 느슨한 고해 사제들에게 몰려가고, 그들 안에서 자신의 파멸을 찾기 때문입니다. 반면 너무 경직된 고해성사가 큰 악을 초래한다는 것도 확실합니다. […] 거슨(Jean Gerson)은 지나친 엄격함은 영혼을 절망에 빠뜨리고 절망에서 악의 심연에 빠지게 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
성 레이먼드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하게 지목하지 않는 한, 대죄를 선언하는 경향이 너무 강해서는 안 된다”고 성인은 가르칩니다. 성 안토니우스도 같은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는 “성경의 권위나 정경, 명백한 이유에 근거하지 않고 어떤 것이 대죄인지 아닌지를 규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인이 덧붙이기를 “위에서 언급한 근거 없이 어떤 행위를 대죄로 선언하는 자는 영혼들을 지옥의 위험에 노출시킨다”고 말하였습니다. […]
마지막으로, 1480년에 번성했던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에 의해 이 가르침이 더욱 분명하게 정립되었습니다. 비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더 가능성이 높은 의견은, 우리가 매우 명백한 이유나 성경의 공식적인 증언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절대로 치명적인 죄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딸아, 회개와 고백성사는 고해자와 참회자, 그리고 하느님 사이의 개인적 소통이라는 것을 온 인류에게 알려주어라."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6. 12. 7
번역: 성미카엘회 회장 송 바울라 정자
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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