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생애와 옥중서신 마지막 순교 직전 남긴 말씀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옥중서신
가장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잘 생각하여 주십시오.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 오사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을 참아 받으셨습니다. 그 고난으로써 성교회는 세워지고, 이 성교회도 십자가와 많은 고난 속에서 발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서에 의하면 천주는 우리들의 머리털까지도 일일이 헤아리고 계시어서 한가락이라도 허락하심이 없이는 빠져 떨어져 버리는 일이 없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주의 뜻에 따라 우리들의 머리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편이 되어 세속의 마귀에 대해서 항상 싸워 나갑시다.
이러한 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이오니, 용감한 군사와도 같이 씩씩하게 무장하고 전장에 뛰어나가 분투하여 승리를 거둡시다.
특히 서로와의 사이에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돕고 서로 베풀어서 천주께서 당신들에게 자비를 내리시고 당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를 기다립시다.
재앙을 겁내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고 천주를 섬기는 데서 물러나지 말고 오로지 성인들의 자취를 밟아서 성교회의 영광을 높이고 주의 충실한 병사이며 참된 시민임을 증명하여 주시오. 사랑을 잊지 마시오.
서로 참고 도와서 천주가 당신들을 불쌍히 여기실 때를 기다리시오. 쓰고 싶은 것은 많으나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생각대로 되지 않으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나도 천국에서 그대들과 같이 만나 영원한 복을 즐기게 될 것을 바라고 있소. 그대들을 정답게 껴안아 주겠소.
다시 한마디 하고자 하오. 이 세상의 일은 모두 천주의 명령에 말미암은 것이오니, 어떻게 보면 상이냐 벌이냐 하는 것 뿐이오. 박해라는 것도 천주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일어나는 게 아니오. 마땅히 천주를 위하여 힘차게 참아주시오. 오직 성교회에 평화를 주십사고 눈물로써 탄원하시오. 나의 죽음은 당신들에게 확실히 뼈아픈 일일 것이오. 당신들의 영혼은 슬픔에 잠길 것이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주께서는 나보다도 훨씬 훌륭한 목자를 주실 것이 틀림없으니 그리 몹시 슬피 마시고 큰 사랑을 가지고 천주를 섬기도록 힘쓰시오. 없음으로써 한몸 한마음이 됩시다. 그렇게 하면 죽은 후 영원히 주의 앞에서 서로 만나 끝없는 즐거움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요. 나는 천번이고 만번이고 이를 바랍니다
안성미리네 성지의 김대건 신부님의 무덤(오른쪽)
♱ 성김대건신부님의 감옥에서 교우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無始之時)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配設)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慰藉:위로하고 도와 줌)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 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하느님)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 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領洗)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效驗)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 배은(背主背恩)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得罪)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마지막 서한에서)
성김대건신부님의 유해 하악골(아래턱)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김대건신부님께서 남긴말씀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 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순교 직전 최후 증언)
♱ 성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생애
김대건은 1821년 (순조21) 8월21일 충청도 솔뫼 (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과 장흥 고씨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몰락 양반의 가문으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때였다. 김진후는 한국천주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안 되어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그는 신해박해(1791) 때 체포되어 관가에서 신앙을 고백한 적이 있고, 1801년 때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다시 해미에서 잡혀10년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814년 옥사 순교하였다.
진후의 셋째 아들 종한은 솔뫼에서 안동 우련밭으로 피해 살다가 여기서 1815년 을해박해 때체포되어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그리고 종한의 딸 데레사는 1839년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당고개에서 교수되고, 그에 앞서 남편 손연욱(요셉)은 1824년 덕산에서 옥사 하였다. 또 진후의 아우 선후의 손자 제교와 진후의 넷째 아들 희연의 아들인 제항은 1866년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김대건의 숙부 제철의 아들인 진식은 1867년 공주에서, 선식은 해미에서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리고 김대건의 아버지 제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함으로써,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김대건의 가계는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루었다. 김진후의 둘째 아들인 택현은 솔뫼를 떠나 용인군 이동면 묵리 한덕골에 정착하였는데, 1827년 정해박해를 피하여 이곳으로 이주한 듯하다.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이 세례를 받은 것은 1836년이었다. 그는 1836년 초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모방 신부는 1836년 부활절(4월5일)을 전후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하였다. 그는 여기서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고 세례를 주었다. 김대건에 앞서 두 소년이 신학생으로 선발 되었는데 최양업(토마)은 2월 6일에, 최방제는 3월 14일에 각각 서울로 올라와 한문과 라틴어 등 외국으로 유학 갈 공부를 하며 수련에 있었다. 그러나 김대건은 7월 11일에서야 이들과 합류하였다.
모방신부는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보내기로 했다. 세 신학생들은 12월 2일 서울을 떠나기 전, 앞으로 공부하게 될 신학교 교장에게 순명할 것과 교구 신부가 되어 열심히 봉사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12월 3일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방제 신부와 정하상, 조신철 등 신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변문으로 떠났다. 이 때 조선인 신자들은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귀경하였고, 세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남하하여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로서, 신앙인들이 극동 진출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며, 동양 전교 활동의 거점이었다. 출발할 당시에는 세 신학생들이 공부할 장소가 결정되지 않았었다.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동양인 성직자 양성소인 페낭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맡았다.
안성 미리네 성지의 김대건신부님 경당
세 신학생들은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 1837년 8월과 19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그 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다. 김대건의 건강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은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다.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 교구장 베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10월 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 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에 머물면서 3차에 걸 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1843년 4월부터 거처를 소팔가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 곳에는 1841년부터 페레올 신부가 머물고 있었다. 김대건은 1843년 12월 양관에서 있은 제3대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84년 1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 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정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인 만24세 미만이므로 사제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1월 1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고 4월 30일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8월 30일 상해를 출발 40여일 만인 10월 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의 사목 활동 기간은 짧았다. 그는 입국하던 해 11월 12월 사이에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 등을 방문했는데, 은이 공소에는 그의 동생 난식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 두 달이 조선에서 있은 사목 방문 활동의 전부였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행적가
그의 교회 활동은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끝났으니, 말년의 직책은 조선 교구 부교구장 이었다. 그는 1846년 5월 14일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범하여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다 . 거기서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고 10일에는 해주 감영으로 이송 되었다가 다음 날인 6월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김대건은 포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26세였다. 그의 시체는 모래사장에 가매장 되었는데 40일 후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 그의 두개골을 혜화동 소재 가톨릭 대학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 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김대건 신부는 25편의 편지를 남겼는데. 한글본 1편, 한문본 1편 나머지는 라틴어로 쓰여 졌다. 라틴어 편지는 23편으로 비망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은사 신부님에게 보낸 편지들로서 조선 입국 통로를 답사할 때의 보고와 옥중 편지이다. 서두를 "신자들 보아라"로 시작하는 한글 편지는 사형을 앞두고 옥중에서 조선 신자들에게 보낸 회유문이다. 한문 편지는 장문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 입국 통로의 개척을 위한 네 번째 답사 여행 후 기록한 것인데 한문 진본은 없고 프랑스 번역본만이 남아 있다.
안성 김대건신부님 미리네 경당내부
또한 그는 현재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2통의 라틴어 작문과 <조선 전도>도 작성했다. 이중 작문은 신학생 시절에 작성한 것이고, 지도는 선교사의 조선 입국 안내를 위한 일종의 행정 지도로 부제이던 1845년 초 잠시 귀국했을 때 작성한 것이다. 이 밖에도 교회측 기록에는 김대건 신부가 옥중에 있을 때 정부 당국의 요청으로 세계 지도를 작성하고, 지리 개설서를 저술하였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김대건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긴 편지들과 선교사들의 편지뿐이다. 그 편지들은 자신이 겪고 있던 상황을 보고한 글이어서 사상을 체계적으로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사형장에서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다. 나는 천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말했듯이, 그는 하느님과 한국 교회를 죽기까지 사랑하였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것은 신학교 교육과 그의 마음속에 축적되어 있던 가문의 신앙과 한국 전통 문화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김대건은 당시 조선의 전통 사상, 즉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또 하나의 문명 세계인 서양의 학식을 신앙 실천을 통하여 전파하려 하였다. 그는 세계를 일종의 가부장적 공동체로 인식하여 하느님을 인류의 아버지라 하고 인류를 대가족이라 말하면서 모든 인류가 형제와 같이 결합되어 친구처럼 지내는 사해동포주의를 열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계 인식은 중국과 조선을 사대 관계로 파악하고 조선을 중국의 종속국으로 인정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임박한 죽음을 의식하며 마카오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선교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즉 중국의 황제가 조선 왕에게 프랑스 선교사들을 살해하지 못하게 하고, 한국인 신자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도록 명령한다면 해결될 것으로 믿고, 이 일은 중국 주재 프랑스 공사가 중국 황제에게 협조를 요청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1844년 중국과 프랑스 간에 체결과 황포 조약에 따라 중국 황제가 선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중국인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는다는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러한 성공은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대건은 선교열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천주교를 박해하고 프랑스 선교사의 입국을 금지하며 처형하는 조선의 쇄국 정책을 야만적 행위라고까지 비난하였다. 그는 외부의 지원이 없이는 선교에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이 중국의 속국인 한국에서도 실현되기를 기대했으며, 선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은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무력으로 체결한 황포 조약이 한국에서도 적용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 호의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 처해 있는 한국 교회를 구출하고 신앙의 자유를 성취하려는 일념과 민족 구원을 우선적으로 앞세운 나머지, 프랑스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기대한 것이다.
김대건이 지녔던 사상의 중핵은 효애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부터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해 온 전통적 신심의 바탕은 '대군대부' 사상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인류의 대왕이며 공동의 아버지로 믿었다. 이와 같은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왔던 김대건의 의식 바탕에는 전통적 신심이 잠재되어 있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공경한 신심은 한국인이 최고의 가치 덕목이며 윤리의 근본으로 삼아 왔던 효와 깊이 결합되어 있었다. 효의 근본정신은 귀중한 생명을 준 생명의 근원이며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준 부모에 대한 보은 행위이다. 따라서 효도가 인간의 당연한 도리인 반면에 불효는 인간의 가장 큰 죄였으므로 효도하지 않으면 자식도 사람도 아니었다. 효는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며 아버지의 권한은 절대 군주적이었다. 자녀는 아버지에게 최대의 경애를 드리고 절대적으로 순명해야 하며, 아버지의 뜻을 정성으로 받들고 덕행을 실천하여야 했다. 그리고 떳떳한 사람으로 살아 명예를 빛내서 부모에게 영광을 돌려 드려야 했다. 그러나 효는 공경하고 사랑하는 정으로 결합할 때 참다운 의미가 있다. 이처럼 김대건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형벌을 당하고 있다고 했으며, 신자들에게 효애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순교를 통하여 모범을 보임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효애심을 철저하게 실천하였다.
김대건은 하느님을 '임자'라고 표현하였다. 인류를 대가족으로 표현하였듯이 하느님을 대가족의 가장인 임자로 여겼다. 그는 가정에서 권위를 행사하고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지상의 아버지에 대한 경험으로 하느님을 이해한 것이다. 아버지는 자녀의 소유주이고 생사여탈권을 가진 임자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존경과 위엄의 대상일 뿐 아니라 복종과 사랑의 대상이었고, 사람으로서 이러한 임자를 잊고 몰라본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가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라 하였다. 비록 하느님을 위해 세례를 받음으로써 세상에 비할 데 없이 귀한 제자라는 이름을 받았더라도 성화(聖化)되고 의화(義化)되지 않는다면 세례 받은 의미가 없다 하였다. 더구나 죄에 죽고 하느님을 위해 살려는 생활을 포기하여 배은망덕 한다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하므로, 배교는 보본과 보은을 저버리는 행위이자 큰 죄악이며, 하느님은 국가의 임금 위에 있는 지상 절대권자일 뿐 아니라 당신을 공경하도록 명령하므로 배반할 수 없다 하였다. 그는 하느님께 충실히 복종하며 순교한 것이다. 그의 효애 정신과 임자께 대한 순종은 교계 질서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서도 드러난다. 즉,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주교와 신부들의 죽음을 임자인 하느님께 대한 순정의 태도로 여겼고, 자신도 그러한 모범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래서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라는 주교의 명령에 항상 주저함이 없었을 뿐 아니라 죽기까지 실천하였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효애 정신을 강조하며 살았듯이 부모께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 김제준이 순교한 후 유랑하는 신세나 진배없었고, 그래서 그는 순교하기 전 주교에게 자기 어머니를 보살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김대건의 부모에 대한 효도는 바로 하느님께 대한 효도의 시작이었다.
조선 사회는 신분 제도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조선 사회에 한국 천주교회는 교리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가르쳤고 신자들은 실제 생활에서 교리의 가르침을 향유했었다. 그러나 신분제적 의식을 완전히 탈피하거나 사회 체제를 변혁시키지 못하였듯이 김대건 역시 전통 사회의 관념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는 순위도에서 체포될 때, 그리고 해주 감영에서 문초 당할 때 자신의 신분이 양반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자신의 편지 말미에는 자기 이름 앞에 본관을 반드시 적을 정도로 한국의 전통 의식에 젖어 있던 한국인이었다.
김대건의 영성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박해 시대 신자들의 영성과 동일하였다. 그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유교적인 효의 개념에다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신앙이 혼합되어 있다. 그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느님은 창조주, 상선벌악을 결정하는 심판관, 모든 귄위의 절대자, 온갖 환난에서 보호해 주고 힘을 주는 분, 은총으로 섭리하는 분이었다. 또한 하느님을 군주제에 비유하여 임금 위에 있는 절대자로서 당신을 공경하도록 명령할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도록 애덕의 의무를 함께 명령하는 분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신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하느님의 자녀 된 증거로 이웃을 사랑하도록 간곡히 유언하였다. 그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으로 천당과 지옥, 그리고 사후 심판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이 세상은 인간이 항구히 거처할 곳이 아니고 사람은 잠깐 땅 위를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현세를 나그네의 여인숙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영복을 누릴 천당이고, 현세는 천당을 준비하는 곳이지만 현세의 선행에 따라 사후 천당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생전의 선행은 사후의 노자라고 말했다. 현재와 내세, 천당과 지옥은 긴장과 대립의 관계였다. 김대건은 현세를 천국을 얻기 위한 영혼의 전투장, 사형 집행장을 영혼이 재적해야 할 최후의 격전장으로 보았다. 그래서 천국을 얻으려면 마음을 허실하게 먹지 말고 주야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영혼의 삼구와 투쟁하여 박해를 극복하라고 하였다.
성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모친 고울술라 묘지
그는 박해를 영혼의 위기로 보았고, 하느님을 공경하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서 신자들을 전투장의 군사로 표현하였다. 신자들은 하느님의 주권 아래 사는 사람답게 박해에 굴복하여 사주구령을 포기하지 말고, 하느님의 착실한 군사와 신자가 된 신분을 증거 해야만 하였다. 그는 신자 공동체를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무기를 갖추고 전쟁터에 있는 전투적 공동체, 즉 신전지 교회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표현하며, 이미 만물이 그리스도께 굴복되었듯이 신자들도 예수의 편에 서서 악의 세력과 용감히 싸워 승리하라고 독려하였다. 그러나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는 무기는 그리스도였다. 악의 세력과 싸우는'신전지 교회'의 모습은 사도 바오로의 옥중 서간인 에페소서 6장 10-20절을 연상케 한다. 김대건이 표현한 순교자의 영광은 개선 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그는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전투를 벌여 승리를 얻은 후, 붉은 옷을 두르고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도로 개선가를 부르며 들어갔을 것으로 말하면서 피악수선을 성인. 성녀들의 발자취로 표현하였다. 박해 시대의 작품인 <사향가>의 가사 중에서는 전투적 공동체의 모습을 모방한 내용이 노래 불러지고 있다.
김대건의 순교 정신은 효애 정신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그러나 그는 순교를 그리스도의 순교와 연결 지어 말하고 있다. 그는 순교를 하느님께 순종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하나의 덕행으로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순종하며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고 맡겨진 목자로서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증거로 자유로이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한국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한 선교사들의 원형으로 말하고, 순교를 사목자의 사명을 수행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스도가 당신 양들을 위하여 자의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듯이 사목자라면 양들을 위하여 자의적으로 최고의 청원인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의식하고, 자기의 죽음을 목자로서의 사명과 불가분의 일로 여겼다.
김대건은 그리스도께 자기를 전적으로 내맡기며 그리스도의 승리와 은총을 굳게 믿었다. 그는 옥중에서 말하기를, 자신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결박당해 있으며, 그리스도의 승리와 은총을 굳게 믿는다 하였다. 김대건은 교회의 시작을 그리스도의 순교로부터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무수한 수난을 받고 순교로써 교회를 세웠듯이 교회도 당연히 수난을 겪으면서 자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신자들에게 상기시키면서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박해를 당연한 것으로 말하였다. 그러면서 시련을 견디는 충실한 신자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한 몸 같이 형제애를 나누며, 낙담하지 말고 자시 자신에게 충실하며, 마음을 견고하게 다지고 박해에 임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희망도 강하였다. 그는 배를 타고 항해일 때나 대륙을 여행할 때나 급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성모께 깊이 의탁하고 보호를 청하였다. 그러나 성모께 갖는 희망은 '하느님 다음'임 밝혔다.
김대건은 한국 천주교회 설립 후 한국 교회의 희원을 이룬 첫 사제였다. 그의 인물됨에 대하여 당시의 조선 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는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신실한 신심, 놀랄 만큼 유창한 말씨는 한 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 주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서양 학문을 직접 수학하고 체득한 지식인답게 세계 조류에 대해 폭 넓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세계정세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문호를 개방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 발전에 유익한 일임을 역설한 선각자였다. 그는 하느님에게 사로잡힌 사람답게 죽음을 목전에 둔 극한 상황에서도 천주교의 진리를 설파했고, 하느님과 교회, 교회의 장상과 동료들, 그리고 신자들을 깊은 애정으로 사랑하였다. 그는 사목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다가 죽음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하였다.
< 출처 : 한국 가톨릭 대사전> 교우들 보아라.에서 발취
● 김대건 신학생의 첫 번째 편지
발신일 : 1842년 2월 28일
발신지 : 마닐라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존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조선을 향해 출발하게 되어 이 기회에 잠시 틈을 내어 신부님께 짤막한 편지를 올립니다.
신부님과 우리가 헤어진 지도 벌써 아주 많은 날들이 지났습니다. 2월 16일쯤에 리부아 대표 신부님께서 메스트르 신부님이 저를 데리고 조선으로 가도록 배정하셨습니다.
이 여행이 비록 험난할 줄을 압니다마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사하게 지켜주시리라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갑니다. 그 군함은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이 중국에 파견한 사절 장시니씨를 마카오에 태워다 준 군함입니다.
우리는 마카오를 떠난 후 하느님의 보호로 순조롭게 항해하여 마닐라에 입항하였고 여기서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장만해 가지고 2월말쯤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신부님, 내내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이곳 신부님들과 우리도 모두 건강히 잘 있습니다.
신부님과 작별한 후로는 오늘까지 프랑스어 공부를 못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정에 대해서는 대표부 신부님들이 편지하실 것이므로 저는 여기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최 토마스(최양업)는 지금 혼자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스승님께 기도 중에 저를 기억해 주시기를 청하며, 저도 신부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부당한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김대건은 1842년 5월 15일부터 5월 21일까지 주산에 체류했다. 그는 주산에서 리부아 신부님에게 두 번재 편지를 올렸는데 그 편지는 유실되어 현재존계하지 않는다.)
● 김대건 신학생의 두 번째 편지 (유실)
발신일 : 1842년 5월
발신지 : 주산
수신인 : 리부아 신부
● 김대건 신학생의 세 번째 편지
발신일 : 1842년 9월
발신지 : 상해
수신인 : 리부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마카오의 리부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우리가 아직 주산(舟山)에 머물러 있을 때 신부님께 제가 짧은 편지를 드렸습니다. 이제 다시 짧은 편지를 드립니다.
마침내 우리는 주산에서 돛을 펴고 출범하여 영국 함선 20척과 함께 양자강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출발할 날을 기다리며 오늘까지 머물러 있습니다. 세실 함장이 약속한 대로 우리는 에리곤호로 조선에 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하여 조선으로 갈 가망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세실 함장은 마닐라로 향하여 출범하였고, 우리는 지금 여행 보따리를 가지고 양자강 기슭에 있는 어떤 외교인 집에 머물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오래지 않아 에리곤호로 출발할 예정이었습니다. 세실함장은 아직도 자기는 조선으로 갈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만일 조선으로 가는 항해 중에 역풍이 불어 닥칠 경우에는 항로를 바꾸어 마닐라로 갈 것이라고 잘라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애매모호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메스트르 신부님은 에리곤호에 머물러 있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하느님의 섭리와 산동(山東) 주교님(Bézi)의 안배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브뤼니에르 신부님이 상해에 계시는 주교님한테 파견하였던 범(范) 요한이 돌아오기만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인 범 요한은 조선과 류규의 대목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이 류규에 파견할 전교사였다.) 그러나 범 요한이 돌아오지 않기에 브뤼니에르 신부님은 토마스와 함께 우리가 머물고 있던 집으로 갔는데, 우리는 에리곤호로 출발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막 돛을 올려 출범하려는데 범 요한이 상해로부터 천주교 신자들의 작은 배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메스트르 신부님은 즉시 계획을 바꾸어 저와 함께 위에서 언급한 황세흥(黃世興)이라는 외교인의 집으로 갔습니다. 세실 함장은 마닐라로 출발하였습니다.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토마스는 9월 11일에 범 요한과 천주교 신자들의 작은 배를 동반하고 영국 군함을 타고 갔는데, 거기서 의복을 바꿔 변장을 하고 상해에 계시는 주교님한테 가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람의 도움을 모두 잃고 외교인 황세흥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조선으로 향해 갈 길을 달리 모색하며 출발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부님도 아시겠지만 영국군은 여기서 강 오른편 연안에 있는 몇몇 도시와 상해를 함락시키고 남경(南京)으로 진격하였습니다. 도중에 성곽과 천연적 지형으로 방어된 도시도 점령하였는데 그 도시는 진강부(鎭江府)라고 불립니다. 이 도시의 왼편에 있는 제국 운하 근처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금으로 된 섬이라는 금산(金山)이 있습니다.
영국군이 남경에 도착하여 그 도시 북쪽에 있는 산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그 도시를 점령하고자 했습니다. 중국 관리들은 이 광경을 보고 벌벌 떨면서 영국군에게 강화를 청하러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영국군은 이런 사실을 알고 사태를 짜임새 있게 수습하려고저들의 제의를 받아들여 강화조약(이른바 남경조약)을 맺고 8월 29일에 조인하였습니다. 영국인들과 이 강화조약을 몇은 증국측 고관들의 성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황제의 외숙부 기엔씨
대청제국 전권대사 이리포씨
달단군 장군 티씨
강남 총독 뉴킹씨
그 후 황제가 강화조약과 그 조건을 승낙한다는 내용의 칙서를 내렸습니다. 강화조약의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중국은 영국에게 배상금 2천백만 원(元)을 지불할 것.
2. 중국은 6개 항구(港口)에서 영국과의 통상을 승인할 것.
3. 영국은 북경 황제에게 대사를 파견할 것.
세실 함장은 남경에 상륙하기를 원하여 중국인의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하였는데 그 배는 밝고 고약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사용 불가라고 되어 있더랍니다.
실제로 그 배가 여러 군데에 물이 스며드는 것을 보고 더 견고한 배를 구하려고 뒤프레씨와 저를 상해로 보냈습니다. 우리는 상해 부근에 상륙하여 중국 관리의 도움을 얻어 상당히 큰 배를 장만하였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배를 젓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두세 번 땅에 부딪쳤습니다. 그 이튿날 근인들을 더 많이 파견하여 배를 끌어왔습니다.
이 배를 가져온 다음에 세실 함장은 부관 뒤프레씨와 (프랑스 왕)필립의 사절, 지리학자와 저, 그리고 약 20명의 선원을 대동하고 16일 동안 항해한 후 강화조약이 조인되던 바로 그날 남경에 도착하여 조인식에 참석하고 4명의 중국인 고관을 전부 만났습니다.
그 이튿날은 남경 탑과 교외를 관광하였는데, 성안 시가지에 들어가는 것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영국인에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영국군이 앞에 말한 진강부를 점령하는 데 백50명의 군인을 잃었다며 도시 전체가 파괴되고 악취가 가득하였습니다.
이 도시의 중국 고관은 영국군이 승리한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자녀들을 모아놓고 집에 불을 질러 모두 함께 타 죽었다고 합니다.
메스트르 신부님도 편지하실 테니까 저는 많이 쓰지 않겠습니다. 스승님께 기도 중에 저를 기억해 주시기를 청하고, 아울러 내내 안녕하기를 빕니다.
공경하올 스승님께, 무익한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추신 : 파리에 계시는 장상께서 우리가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것을 금하셨다는 것을 메스트르 신부님을 통해서 확실히 알았습니다. 프랑스어 공부에 관해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공부를 계속해야 할지 또는 아주 포기해야 할지를 대표 신부님(리부아)께 문의해 보라고 메스트르 신부님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편지에 쓰신 대로 프랑스어 공부에 대해서 포기해야 하는지 또는 계속해야 하는지를 문의할 필요가 없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현 상황이 공부를 계속 허용치 않으며, 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완전히 포기할 이유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 김대건 신학생의 네 번째 편지
발신일 : 1842년 12월 9일
발신지 : 요동 백가점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요동에서.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우리가 아직 마닐라에 있을 때 신부님께 편지를 올렸으나 그 동안에 있었던 우리 여행에 대하여 보고를 드리려고 신부님께 다시 편지를 올립니다.
마침내 우리는 마닐라를 떠나 순풍에 따라 항해하여 대만섬까지 다다랐으나, 거기서부터는 작은 폭풍우와 역풍을 만났습니다.
신부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섬은 길이가 6백 리로서 초목과 산림이 울창하고 경치가 매우 좋을 뿐 아니라 토지도 매우 비옥하게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매우 높은 산들도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흰 눈이 덮여 있습니다.
이 섬의 주민들은 특유한 방언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가 우리에게 생선을 팔려고 다가왔는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섬을 떠나 며칠 지나서 주산에 덫을 내렸습니다. 주산은 산이 많고 메마른 작은 섬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시내 구경도 하고 또 얼마 전에 부임하신 라자리스트회 신부님들을 만나볼 겸 해서 주산 시내에 몇 번 들어갔는데 원주민 외에는 신기한 것은 하나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을 ‘검은 악마’라고 부르고 멸시하여 왕처럼 손에 지팡이를 잡고 겁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주산에서 약 두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동안에 영국인들이 남경을 탐험하기 위하여 출발하였으므로 우리도 그들을 따라 4일 걸려 양자강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강 중간에는 숭명(崇明)이라는 상당히 큰 섬이 있는데 갈대와 초목과 숲이 빽빽이 우거지고 주민도 많으며 섬 이름과 같은 도시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작은 개울이 사방으로 흘러서 대체로 푸르러고 쾌적하며 비옥한 평야입니다. 강 오른쪽에 두 개의 도시가 있는데, 하나는 보산이라고 하고 또 하나는 오송구라고 합니다. 오송구는 양자강 황해 어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도시는 영국군의 공격으로 주민들은 모두 피난하여 텅 비었고 전투 때문에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오송구 방면에서 운하라는 말이 더 맞는 두 개의 강이 양자강으로 흘러드는데 작은 것은 운조방이라고 하고, 큰 것은 황포강이라고 합니다. 황포강은 상해 시내를 통과합니다. 상해는 해안에서 40리 떨어져있는 도시로 영국인들에게 개항된 항구 중 하나입니다.
7월 하순에 영국군이 남경을 점령하려 진격한 지 약 15일 후, 중국 제2급 도시인 진강부에 도달하여 단시일에 함락시키고 요새에 군대를 배치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백 명 이상의 영국 군인과 3천 명의 달단 군인이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 도시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달단군의 장군은 승산이 없음을 알고 집으로 돌아가 불을 질러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타 죽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에 우리는 출발할 날을 고대하며 오송구에서 퍽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세실 함장이 남경시를 구경하기를 원해서 중국 배 한 척을 임대하였는데, 에리곤호는 강을 거슬러 오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가지고 3명의 장교와 선원들을 데리고 출발했는데 저는 통역관으로 따라갔으며 메스트르 신부님은 에리곤호에 그대로 머물러 계셨습니다.
출발한 지 약 6일 만에 진강부에 도착하여 하루 동안 도보로 시가지를 걸어 다니면서 구경하였는데, 전쟁으로 파괴되고 강도들의 습격으로도 약탈되어 폐허가 된 시가지는 사방에서 악취가 났습니다.
시가지는 두 개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하나는 달단인들의 거주지였고, 하나는 중국인들의 거주지였습니다. 이것은 양자강 오른쪽에 건설되어 있고, 맞은편에서는 중국인들이 운량호라고 부르는 제국운하가 흐르는데 물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한 주요한 수문이 9개나 있다고 합니다.
진강부와 제국운하 사이에 금산, 즉 금으로 된 섬이라고 부르는 중국인들에게 매우 유명한 섬이 있습니다. 초목이 울창한 그 섬에는 황제 두 명의 무덤과 황제 직할의 절과 고대로부터 유명한 제국 도서관이 있답니다. 전쟁 전에는 그 절에 3천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다시 닻을 올리고 떠나 남경에 가서 닻을 내렸습니다. 남경 시가지는 파괴되지 않고 멀쩡하였으며 영국인과 중국인이 강화조약을 맺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눈앞에 당도한 영국군의 병력과 위협에 중국인들은 대경실색하여 강화를 청 하였던가 봅니다.
황제는 4명의 고관대작에게 이 강화조약을 체결하도록 위임하여 8월 29일에 강화 회담을 마치고 조약문에 조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리라고 단정하는 중국인이 많습니다.
신부님도 아시겠지만 남경시에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탑이 있는데, 장교들이 그것을 구경하러 가기에 저도 그들을 따라가서 탑과 시가 전체를 구경하였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남경은 인구가 백만 명이라고 하는데 아주 평탄하며 두 개의 운하로 구분되어 있고, 도시는 크고 넓지만 아름답지는 못합니다. 도시 북쪽에 산이 있는데 그곳에 영국군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보인사(寶印寺)라고 하는 절 가운데 높이가 2백 척이나 되는 탑이 세워져 있는데 여러 가지 색깔의 돌과 도금한 돌로 되어 있고 그 돌 위에는 여러 신의 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탑의 외부는 여러 가지 색깔의 기와로 입혀져 있는데 그 모양은 팔각형이고 백50개의 작은 종들과 두 개의 금 구슬이 있고, 그 밖에도 눈에 확 띄는 등이 12개나 달려 있습니다. 이 등들 덕분에 위로는 33천(天)을 비추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비추어 사람들의 선행과 악행을 분간한다고 중국인들은 믿고 있습니다.
탑의 맨 꼭대기에는 중량이 9백 근이나 되는 질그릇 단지 두 개와 천반(天盤), 즉 하늘의 접시라고 하는 4백 50근이나 되는 접시가 있습니다. 탑이 광채로 온 세상을 비춘다고 믿고들 있습니다. 탑의 기단에는 여러 겹의 둥근 원이 있는데 그 무게가 3천 6백 근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탑을 다섯 가지 보석으로 꾸몄는데 그것들은 각각 밤을 비추는 야명주(夜明珠), 비를 쫓는 비수주(備水珠), 화재를 막는 비화주(備火珠), 폭풍우를 피하는 비풍주(備風珠), 먼지로부터 탑을 보호해주는 비진주(備塵珠) 등으로 불립니다.
그 밖에 또 중국인들의 거룩한 책(經典) 3권이 보관되어 있는데 비교(秘敎)의 책인 「장경(藏經)」, 기도서인 「아미타불경(阿彌陀佛經)」, 부처님 경배 권유서인 「제인불경(濟人佛經)」이라는 것입니다.
이 절과 탑의 기초는 대략 2천 년 전에 세워졌답니다. 처음에는 탑의 이름을 고이왕 탑이라고 불렀다가 체우라는 황제가 즉위 제3년에 퇴락한 절을 보수하여 견초사, 즉 첫째 절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순카오라는 사람이 절을 쇠붙이로 파괴한 것을 진왕조의 키엔운 황제가 재건하여 창건사(創建寺)라고 불렀다 합니다.
그러나 제20대 왕조인 원(元)에 이르러서 황재로 전소된 채 있다가 제21대 왕조인 명(明)의 영락 황제가 예전의 상태로 제건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에는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청(淸)까지 22개의 왕조가 있었습니다.
그 절을 재건하는 데 19년이 걸렸는데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탑을 세우는 데만 거의 4백만 원의 비용이 들었다 합니다. 그후 카친 황제 때에 탑의 3분의 1이 벼락으로 무너졌었는데 근래에 수리하였다고 합니다.
관광을 마치고 오송구로 돌아오는 도중에 우리가 고대하던 파보리트호(프랑스 군함)를 만났습니다. 그 배로부터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그의 두 동행인 토마스(최양업)와 범 요한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과 괴로움을 한꺼번에 느꼈습니다. 우리가 모두 모였으니까 즐겁기는 하나 우리의 사정이 더욱 곤란한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또한 서글펐습니다.
그뿐 아니라 제가 에리곤호(프랑스 군함)에 도착하여 보니까 신부님들이 범 요한으로 하여금 브뤼니에르 신부님을 안내도 하고, 베롤 주교님(1838년에 신설된 만주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 주교)에게로 가는 짐에 대한 처리도 하도록 상해의 신자들한테 심부름을 보냈는데 그가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세실 함장이 조금 있다가 출범할 것이라고 똑똑히 말하였지만 하루 종일 범 요한을 기다렸어도 허사였고 속히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들은 부득이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토마스가 여행 보따리를 맡아가지고 육지에 내려서 범 요한의 귀환을 기다리게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말하기는 쉽지마는 실행하기는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비하신 안배로 다행히 우리와 오래전부터 친밀히 교제하였던 황세흥이라는 해변에 거주하는 외교인이 에리곤호 출항 전날 저녁에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하여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토마스는 거의 동의를 얻어 여행 보따리를 가지고 그의 집으로 가 있기로 하였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과 저는 예정한 대로 에리곤호로 우리의 선교지인 조선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였으나 세실 함장은 함선 안에 환자가 많고 자기의 여행 예정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조선으로 가는 항해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이 질문하니까 그는 자기가 조선을 향하여 항해하기는 하겠으나 만일 항해 중에 어디서든지 역풍을 만나면 곧바로 마닐라로 뱃머리를 돌릴 것이라고 조건부로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딱한 형편에 처해 있었으므로 메스트르 신부님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우리가 마닐라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 봐 근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세실 함장이 돛을 펴서 출범하려 할 때에 마침 범 요한이 돌아와 당시 상해 근처에 체류하던 산동지방의 강남 직할서리구장이신 존경하올 베지 주교님께서 짐 보따리에 대해 조치하신 경위를 신부님께 보고하였습니다. 그 보고를 듣고 신부님은 더 안전한 편을 취하기로 하고 저와 함께 황세흥씨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 브뤼니에르 신부님은 범 요한과 토마스를 데리고 그 근처에 정박하고 있던 영국 군함을 타고 의복을 변장하여 베지 주교님께로 급히 갔습니다.
우리는 그 외교인 집에 5일 동안 묵은 다음에 같은 군함에 올라가서 숙박을 청하니 그들은 우리를 매우 환대하였습니다. 하루를 지낸 후 우리는 주교님께로 가서 환대를 받았고 주교님의 알선으로 어떤 신자의 배를 타고 약 15일을 걸려 우리가 향하여 가던 태장하(太莊河)에 입항하였습니다. 이 항해 중에 역풍으로 두세 번이나 출범하였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 외에는 별로 역경은 없었습니다.
일을 주선하도록 범 요한을 교우촌에 심부름 보냈더니 그는 거기에 머물고 두(杜) 요셉이라는 교우촌 회장을 우리한테 보내왔습니다. 신부님들은 밤에 군함에서 내려 상륙하기로 작정하셨으나 주위환경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낮에 교우촌 회장을 따라 상륙하였고, 짐 보따리는 다른 배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떤 외교인들이 신부님들을 보고 유럽 사람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우리가 세관에 가까이 갔을 때 안내자는 여러 가지 귀찮은 질문을 피하고 싶어서 우리에게 강변에 내려서 검문 장소를 슬그머니 지나가도록 권하였습니다.
그곳은 물이 빠진 지 얼마 안 되어 대단히 질퍽거렸는데 세관에서 빤히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한편 두 요셉은 토마스를 데리고 일을 처리하러 세관으로 곧장 갔습니다. 우리는 메스트르 신부님, 브뤼니에르 신부님, 두 명의 선원과 저, 이렇게 다섯 명이었습니다.
외교인들은 우리가 질퍽하고 길도 없는 강변에서 허둥거리는 것을 보고 한편에서는 신부님들을 영국인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20 여명이 고함을 치며 우리한테로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손님 안내자였는데 우리는 그들을 경찰관인 줄로 여겨 겁이 났습니다. 사실 그들 중에는 경찰관도 몇 명 있었습니다.
장소 관계로 조금 떨어져 있던 선원들에게 제가 귓속말로 신부님들 곁으로 가까이 가라고 말했지마는 그들은 무서워서 안색이 변했고 고개도 쳐들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붙잡으며 여러 가지로 힐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곧장 걸어갔습니다. 저는 우리가 소매 속에 감추어 가지고 가던 책 때문에 매우 걱정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붙잡고 힐문하였으므로 제가 화난 목소리로 “당신네들은 안녕질서를 위하여 정부에서 임명한 경찰관이면서 무고한 인민을 모욕적으로 대한다.”고 꾸짖었더니 그들은 우리를 내버려 두고 떠나갔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옥신각신하고 있는 동안에 두 요셉 회장과 토마스는 우리가 체포되어 법정에 끌려가는 줄로 짐작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 우리는 수레를 타고 요셉의 집에 다다랐으나 두씨 가족 외에 다른 신자들은 모두 신부님들을 맞이하기를 꺼려했습니다. 베롤 주교님이 그들 집에 유숙하는 것도 그들은 원하지 않았으니만큼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범 요한과 토마스는 개주(蓋州) 근처 교우촌으로 갔고, 메스트르 신부님과 저는 어떤 과부의 작은 집을 세내어 머물면서 조선으로 출발할 날과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선에 대한 확실한 소식은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베롤 주교님한테서 변문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연락원은 외교인 상인들한테서 탐문하여 알아낸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연락원이 조선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고 합니다.
“2명의 외국인이 3백 명의 조선인과 함께 잡혀 다 같이 사형을 받았고, 왕의 통역관 유 아우구스티노(劉進吉)는 이 불행한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참수된 후 그의 시체는 여섯 갈래로 찢겨 새들의 밥이 되었으며, 그의 온 가족이 멸족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째서 그 외국인들과 조선인들이 학살되었느냐고 연락원이 다시 물으니까 그 외국인들은 3개 국어, 즉 조선말, 중국말, 서양말과 글에 정통한 자들로서 나쁜 종교로 조선 사람들을 부패시켰기 때문에 학살 되었으며 조선인들은 사악한 종교를 받아들여 그 서양인들을 추종하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연락원이 세 번째로 질문하니까 그들은 대답하려 하지 않더랍니다.
그 밖에도 신부님들이 체포된 것은 거짓 신자에 의하여 밀고 되었기 때문이라고 연락원이 보고하였습니다. 그 거짓 신자는 신부님들의 얼굴을 익혀두려고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신부님한테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황이 불확실한 가운데 메스트르 신부님과 저는 12월 20일을 기하여 조선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연락원들과 다른 여러 사람들은 이 계획이 무모하고 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단언하면서, 조선과의 연락은 하느님께서 큰 기적을 행하시지 아니하는 한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하며 우리의 계획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우리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고 다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것을 계획하고 있느니만큼 조선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기만 하다면 무슨 위험인들 마다하겠습니까.
더구나 메스트르 신부님의 출발은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닙니다. 신부님은 저에게 더 큰 어려움이 보태지지 않도록 저와 동행하기를 주저하고 계십니다.
스승님도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위험이 없지 않고 또한 주위상황과 저의 무능과 허약함이 이 위험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은혜로 위험 속에서도 무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행에 필요한 물건은 벌써 다 준비되었고, 의복과 신발은 할 수 있는 대로 같이 묶어두었습니다. 조선에 들어갈 대는 더 쉽게 잠입하고 악마의 심부름꾼들 편에서 우리를 덜 주목하도록 거지로 위장할 작정입니다.
이곳은 모든 분들이 다 안녕하시고 저도 허약하나마 그럭저럭 건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만 편지를 끝내면서 스승님께 의지하는 이 작은 아들을 하느님과 성모님 대전에 항상 기억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조선에 들어간 후에 저에게 닥칠 모든 사항에 대하여 신부님께 편지를 올리겠습니다.
지극히 좋으시고 공경하올 신부님, 내내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부당한 아들 조선인 김 안드레아가 인사드립니다.
추신 : 이 편지를 다시 뜯고 새 소식을 추가합니다.
저는 매일 메스트르 신부님한테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으며, 토마스는 만주에서 페레올 주교님 곁에 있습니다.
저는 요즘 프랑스어 공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이 유럽에서 온 서신을 받으시고 저에게 프랑스어 공부를 전적으로 포기하도록 엄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어 회화는 저에게 분명히 유익하지 않습니다마는 에리곤호에 오랫동안 타고 있었기에 약간은 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프랑스어 독서는 저에게 무익하다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애써서 배운 프랑스어 독서를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듯합니다.
만일 제가 불라사전(佛羅辭典)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프랑스어 책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마카오에서 떠나올 때 리부아 신부님이 저에게 프랑스어 책을 주셨는데 그 가운데서 몇 권은 메스트르 신부님의 분부로 버렸습니다.
토마스는 프랑스어 책들을 읽을 허락을 받았는데, 그 프랑스어 책들은 그가 마카오에서 떠나올 때 리부아 대표 신부님이 유럽에서 온 서신을 받은 후 불라사전과 라불사전과 함께 주신 것입니다.
● 김대건 신학생의 다섯 번째 편지
발신일 : 1842년 12월 21일
발신지 : 요동 백가점
수신인 : 리부아 신부
(네 번째 편지와 다섯 번째 편지는 일부 내용이 중복되어 있다. 그러나 편지를 받는 분이 다르다.)
예수 마리아 요셉,
리부아 신부님께 백가점에서
우리는 계획한 대로 에리곤호를 타고 우리의 선교지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신부님께 알려드렸으리라 생각됩니다마는 아주 엉뚱한 다른 일들이 연거푸 일어난 뒤에 우리는 산동 대목구장이며 강남 직할서리구장이신 존경하올 플로렌티노 베지 주교님께로 인도되었습니다.
우리는 주교님으로부터 아주 환대를 받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신자의 배를 마련하여 주셔서 약 보름이 걸려 우리가 목적했던 태장하 항구에 다다랐습니다. 이 항해는 순조로워 아무런 역경도 당하지 않았고 다만 북풍이 우리의 항진을 더디게 하였을 뿐입니다. 배 안에서는 네 사람 외에는 모두 신자들이어서 이들은 우리를 잘 대우해 주었고 신부님들께서는 매일 하느님께 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
범 요한은 일을 주선하도록 요동 교우촌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거기에 머물고 그 대신에 두 요셉이라고 하는 교우촌 회장을 보내왔습니다. 공경하올 신부님들과 우리가 계획한 대로 신부님들을 밤중에 인도하려고 하였으나 그때의 주변상황이 이를 허용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날이 환히 밝은 후에야 외교인들의 작은 배로 짐을 보내고 우리는 두 셉의 안내로 배에서 내렸습니다. 짐을 운반하기 위하여 두 명의 선원이 우리 배에 올라탔는데, 그들이 미소를 짓고 계시는 신부님들을 보고 서양 사람인 줄 알아차렸습니다.
우리가 세관에 접근하였을 때 두 요셉은 저에게 방금 물이 빠져서 대단히 질퍽거리는 강변에 신부님과 함께 내리도록 귓속말을 하였습니다. 그곳은 세관에서 마주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신부님들이 세관에서 봉변을 당할까 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토마스(최양업)와 함께 세관으로 직행하였습니다.
우리는 메스트르 신부님과 브뤼니에르 신부님, 두 명의 선원 그리고 저까지 다섯 명이었는데, 모두 진흙에 발이 빠졌고 길도 아닌 곳을 허둥대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외교인들은 신부님들을 보고 영국인이라고 떠들었습니다.
잠시 길을 걷고 있을 때 세관 쪽에서 30명 가량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고함을 치면서 달려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경찰관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경찰관도 있고 손님의 안내자도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걸어가시고 그들은 오랫동안 힐문하여 우리를 괴롭힌 후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백가점이라 불리는 교우촌으로 길을 재촉하였고 두 요셉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 촌락은 바다에서 60리 가량 떨어져 있는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신자들이 2백 명 가량 살고 있는 곳입니다.
두 요셉의 가족 외에는 이곳 신자들은 신부님을 영접하기를 꺼리며 더구나 신부님을 쫓아내려고 음모를 꾸미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베롤 주교님이 그들 집에 머무시는 것도 그들이 원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직 인심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여 주교님과 신부님들에게 불쾌한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편지지가 넉넉하다면 신부님께 그런 사정을 전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브뤼니에르 신부님은 토마스와 함께 개주 부근에 있는 양관(陽關)이라는 교우촌에 계시고 메스트르 신부님은 저와 함께 어떤 과부의 조그마한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온 소식에 대하여는 신부님께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다만 존경하올 베롤 주교님이 변문에 파견한 연락원이 외교인들한테서 얻어 듣고 돌아와 주교님께 보고한 바를 전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들리는 바로는 조선어와 중국어와 서양어에 능통한 두 명의 외국인이 종교를 이유로 조선인 3백 명과 함께 참수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 아우구스티노는 그렇게 엄청난 범죄의 주모자로서 죽음을 당하고 그의 시체는 여섯 조각으로 찟겨 새들의 밥이 되었으며 그의 모든 가족은 멸족되었다 합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신부님들은 거짓 신자로부터 밀고 당하였다 하며 그자는 신부님 얼굴을 익히려는 의도에서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공경하올 베롤 주교님과 메스트르 신부님의 계획대로 조선으로 갈 출발일을 12월 22일로 정하였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은 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고자 하였으나 스승님도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위험이 없지 아니하므로 존경하올 베롤 주교님께서 저에게 어려움이 더 커질까 염려하여 메스트르 신부님의 동행을 금하셨습니다.
만일 직접 대면하여 말씀드릴 수 있다면 아직도 스승님께 드릴 말씀이 많으나 편지로 이 모든 사정을 일일이 적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멈추고 공경하고 경애하올 스승님께 이 작은 아들을 기도 중에 항상 기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순명하는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절합니다.
백가점에서 1842년 12월 21일
새 소식을 추가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개봉하였습니다.
● 김대건 신학생의 여섯 번째 편지
발신일 : 1843년 1월 15일
발신지 : 요동 백가점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여섯 번째 편지와 일곱 번째 편지의 일부 내용이 중복되어 있으나 편지를 받는 분이 다르다.)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저는 계획대로 12월 23일에 떠나 나흘 후에 아무런 장애 없이 변문에 도착하였습니다. 변문에서 멀지 않는 곳을 지나가다가 길에서 굉장히 큰 무리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들어가는 조선 임금님의 사신 일행을 만났습니다.
하느님의 안배로 그 일행 중에 김 프란치스코라는 조선의 연락원이 저에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저도 그를 모르고 그 역시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제가 그에게 신자냐고 물었더니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고 세례명은 프란치스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함께 온 중국인 안내자들을 멀리서 뒤따라오게 하고 그를 따라가면서 우선 조선에 계신 신부님들의 안부부터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어보면 신부님들은 종교의 이유로 살해되었고 2백여 명의 신자도 처형되었는데 그들 중에 대다수가 지도급 인사였다고 합니다.
저의 형제 토마스(최양업)의 부모도 살해되었는데 부친(최경환)은 곤장으로, 모친(이성례)은 칼을 받아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의 부모 역시 많은 고난을 당하여 부친(김제준)은 참수되었고, 모친(고 우르술라)은 의탁할 곳이 없는 비참한 몸으로 신자들 집을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프란치스코가 저에게 이야기한 것이 매우 많으나 여기에 다 기록하기에는 너무 장황할 것 같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앵베르) 주교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배신자와 포졸들의 수색을 받으시어 수원이라는 곳에 은신하셨는데 유다(김여상)가 지옥의 심부름꾼들을 거느리고 그곳에 당도하자 주교님은 쉽사리 더 피신할 수 없음을 아시고 스스로 포졸들 앞에 나가시어 재판소로 끌려 가셨다고 합니다.
(모방, 샤스탕) 신부님 두 분도 자수하지 않으면 천주교인이라는 이름까지 전멸될 것이라는 말을 주교님이 들으시고 편지를 보내어 두 분 신부님을 서울로 불러 올려 다 같이 한날에 순교의 화관을 받으셨다 합니다.
오! 이분들은 참으로 찬란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얻은 후 황제의 붉은 옷을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소로 개선 용사로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얼마나 불행한 땅입니까! 그렇게나 여러 해 동안 목자들을 여의고 외로이 지내다가 갖은 노력을 들여가며 가까스로 맞이한 신부님들을 일시에 모두 잃었으니 조선은 얼마나 불운합니까. 적어도 한 분만이라도 남겨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모두 다 삼켜버렸으니 조선은 참으로 안타깝고 괘씸합니다.
요새는 박해가 멎어서 신자들은 조금 안정을 누리고는 있지마는 신부님들이 안 계시어 마치 목자 없는 양떼처럼 탄식하며 방황하고 있답니다.
근년에 신앙을 받아들였다가 주요한 배반자가 된 김여상은 사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사형 이유는 그가 흉악한 인간으로서 남들을 공적으로 해친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는 듯합니다.
다른 사람 하나(김대건의 매부)는 아내의 부모를 신고하였으므로 국법에 따라 교살 당하였습니다. 신부님들과 수많은 신자를 체포한 포도대장도 짐작하건대 남에게 불의한 짓을 저지른 탓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된 후 사형을 받았다고 말들 합니다.
주변 상황이 허락지 않아서 그 밖의 소식을 더 오래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을 인도하기 위하여 변문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고 그에게 물었더니 외교인들의 의혹과 박해의 위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외교인 친구들이 있어 그들의 도움으로 중국에 들어가 북경까지 갈 수 있는 허락을 얻어 사신 일행의 명단에 올라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는 저에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선교사 신부님의 입국에 대하여 다른 신자들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전력을 쏟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저는 신부님들이 1년 후에야 담당 선교지인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2월쯤에 신부님을 인도할 마음으로 곧 조선에 들어갈 여행 준비가 되어 있음을 그에게 밝혔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에게 어느 누구라도 조선에 입국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는 국경을 통과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잘라 말하면서 오직 유일한 방법은 가난한 나무꾼 행세로만 입국할 수 있을 듯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쯤 듣고 나서 그가 가지고 온 편지들을 받아가지고 그와 작별한 후 변문으로 다시 돌아와 하루를 지냈습니다. 이튿날 새벽 1시쯤 일어나 조선옷을 갈아입고 중국인 안내자들을 작별한 후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해가 넘어갈 무렵에 의주 읍내가 멀리 보였습니다. 과연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죄어드는 듯 하였습니다. 특히 나무할 칼을 잊어버리고 변문에 놓고 왔기 때문에 더욱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예로부터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에 달아드는 자는 아무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성문을 향하여 갔습니다.
성문에는 군인이 지키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통행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마침 변문에서 소를 몰고 돌아오는 사람들 틈에 끼여 지나갔습니다. 그곳에 있던 군인이 저에게 통행증을 요구하는 차례가 되었을 때 세관원들한테로 갔습니다. 저는 요행이 몸집이 큰 소의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관에서는 여행자들에게 한 명씩 세관장 앞으로 나아가 성명을 대라고 하였습니다. 날이 어두웠으므로 불을 켜놓고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관장 외에도 다른 세관원 한 사람이 높은 곳에 서서 아무도 달아나지 못하도록 두루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는 어떻게 처신하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한편에서는 이미 조사를 받은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기에 저는 슬그머니 그들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제 등 뒤에서 세관원이 저를 부르며 통행증도 내지 않고 가느냐고 호령하였습니다. 그가 연거푸 저를 부르기에 저는 통행증을 벌써 내주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저를 뒤쫓아오는 줄로 믿고 달아나 성 밖 변두리로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저를 맞아줄 집이 한 채도 없었으므로 밤새도록 대략 백리를 걸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에 너무나 추워서 몸을 녹이려고 어떤 조그마한 주막에 들어갔더니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 얼굴과 의복을 살펴보고 또 말소리를 들어보고 외국 사람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들은 저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제 머리를 살펴보고 제가 신은 중국 버선을 검사하였습니다. 한 사람만 저를 동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를 반대하여 제가 어디로 가든지 잡힐 것이라고 떠벌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백하고 또 조선 사람이니까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나의 근본이 변할 리 없다고 대답하고, 또 혹시 제가 잡힌다 할지라도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은 자기를 변호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마음은 편안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이 말을 듣고서 저를 내쫓았습니다.
제가 조선의 수도 서울, 즉 한양으로 간다는 말을 하였기에 그들은 그런 줄로 알고 간교하게도 사람 하나를 보내어 제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포졸들의 손아귀를 피하기가 지극히 어려웠고, 만일 잡히는 경우에는 제 몸에 지닌 돈만 보더라도 도둑의 혐의를 받아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도둑은 국법에 의하여 모두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정탐꾼이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서 그 사람들에게 제가 정말로 서울 쪽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 작은 주막을 멀리 피하면서 우회하여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뜬 다음에는 감히 길에 나서지를 못하고 수목이 울창한 산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해가 떨어져 어둠이 땅을 내리 덮었을 때 걸음을 재촉하여 새벽 2시쯤에 의주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바다와 반대쪽, 즉 읍의 왼편으로 방향을 정하여 길도 없는 험악한 곳을 헤매었습니다. 이런 곳에도 사방에 지붕이 보이기에 저는 국경 수비대 막사로 여겼습니다.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벌써 해가 떠올라 사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첫째 강과 둘째 강 사이에 낀 황막한 들길을 걸었습니다. 여기는 낮동안 조선 사람들이 중국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길목이었습니다. 저는 걸어가는 도중에 중국 의복으로 갈아입느라고 나머지 한나절을 소비하였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약 백리 길을 걷고 나니 해가 떠올랐습니다. 계속 길을 걸어 저녁때가 지나 변문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물건을 마련하고 5일 만에 백가점에 도착하여 공경하올 메스트르 신부님에게로 되돌아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3월에 프란치스코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평온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전에 정성껏 저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공경하올 신부님,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순명하는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 김대건 신학생의 일곱 번째 편지
발신일 : 1843년 2월 16일
발신지 : 요동 백가점
수신인 : 리부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리부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먼저 써넣은 편지를 아직 보내지 못하였으므로 새로 들은 소식을 추가하여 동봉합니다.
12월 23일에 메스트르 신부님이 안배하신 대로 4일이 걸려 아무런 장애 없이 변문에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에서 온 연락원 김 프란치스코는 벌써부터 변문에 도착하여 여러 날을 머무르면서 우리와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인 안내자들이 오지 않을 줄로 알고 외교인 친구들의 호의와 후원으로 그들을 수행하여 중국에 들어갈 허가를 얻어, 북경으로 들어가는 일행 명단에 올라 조선 임금님이 보내는 사신 일행과 함께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안배로 변문에서 멀지 않은 길거리에서 사신 일행과 함께가는 그를 만났으나 저도 그를 모르고 그 역시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8년 전에 단 한 번 서로 만나본 일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에게 교우냐고 물었더니, 그가 자기는 교우이며 본명은 김 프란치스코라고 대답하였으므로 저도 그에게 비슷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에게 북경행을 중지하고 변문으로 되돌아가서 선교사신부님을 담당 선교지인 조선으로 인도하여 드릴 방도를 의논하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면 외교인 동료들이 수상하게 여길 것이고, 따라서 박해의 위험이 없지 않으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장차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든 노력을 다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같이 온중국인 안내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면서 우선 조선에 계신 신부님들의 안부부터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어보면 신부님들은 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교를 위하여 살해되었고 2백여 명이나 되는 신자가 살해되었는데, 그들 중 다수가 지도급 신자였다고 합니다. 저의 형제 토마스(최양업)의 부모도 살해되었는데 부친(최경환)은 곤장으로, 모친(이성례)은 칼을 받고 두분 다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의 부모도 역시 많은 고난을 당하여 부친(김제준)은 참수되었고, 모친(고 우르술라)은 의탁할 곳 없는 비참한 몸으로 신자들 집을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프란치스코가 저에게 이야기한 것이 매우 많으나 여기에다 기록하기에는 너무 장황할 것 같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앵베르 주교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배반자와 포졸들의 수색을 받으시어 수원이라는 곳에 은신하셨는데 유다가 지옥의 심부름꾼들을 거느리고 그곳에 당도하자 주교님은 쉽사리 더 피신할 수없음을 아시고 스스로 포졸들 앞에 나가시어 재판소로 끌려 가셨다고 합니다.
신부님 두 분도 자수하지 않으면 천주교인이라는 이름까지 전멸될 것이라는 말을 주교님이 들으시고 편지를 보내어 두 분 신부님을 서울로 불러 올려 다 같이 한날에 순교의 화관을 받으셨다 합니다.
오I 이분들은 참으로 찬란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얻은 후 황제의 붉은 옷을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소로 개선 용사로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얼마나 불행한 땅입니까! 그렇게나 여러 해 동안 목자들을 여의고 외로이 지내다가 갖은 노력을 들여가며 가까스로 맞이한 신부님들을 일시에 모두 잃었으니 조선은 얼마나 불운합니까. 적어도 한 분만이라도 남겨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모두 다 삼켜버렸으니 조선은 참으로 안타깝고 괘씸합니다.
요새는 박해가 멎어서 신자들은 조금 안정을 누리고 있지마는 신부님들이 안 계시어 마치 목자 없는 양떼처럼 탄식하며 방황하고 있답니다.
근년에 신앙을 받아들였다가 주요한 배반자가 된 김여상은 사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사형 이유는 그가 흉악한 인간으로서 남들을 공적으로 해친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는 듯합니다.
역사를 보아도 이따위 인물은 사형을 받고 매도 맞게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 하나(김대건의 매부)는 자기 아내의 부모를 신고하였으므로 국법에 따라 교살 당하였습니다. 신부님들과 수많은 신자를 체포한 포도대장도 짐작하건대 남에게 불의한 짓을 저지른 맞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된 후 사형을 받았다고 말들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그에게 어째서 여러 해 동안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첫해(1839년)에는 배반자들의 음모가 무서워서 감히 생각도 못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연락원을 보냈더니 도중에서 객사하고, 두 번째 보낸 자는 변문까지 가기는 했으나 중국인 안내자를 아무도 만나지 못해서 그대로 되돌아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번에도 프란치스코가 변문에 와서 중국인 안내자를 아무도 만나지못해서 자기가 북경까지 들어갈 작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변사정이 허락지 않아 그 밖의 소식을 더 오래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쯤 듣고 나서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온 편지들을 받아가지고 그와 작별한 후 변문으로 다시 돌아와 하루를 지냈습니다. 저는 신부님들이 1년 후에야 담당 선교지인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2월쯤에 신부님을 인도를 할 마음으로 곧 조선에 들어갈 여행 준비를 하였습니다. 제가 프란치스코에게 조선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는 국경을 통과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잘라 말하면서 오직 유일한 방법은 가난한 나무꾼 행세로만 입국할 수 있을 듯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튿날 새벽 1시쯤 일어나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조선옷을 갈아입고 중국인 안내자들을 작별한 후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얼마 안 가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라 숲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무슨 짐승이 가까이 오기에 생각하니 나무할 칼을 잊어버리고 변문에 놓고 왔기에 그곳으로 되돌아가 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후 백30리 되는 길을 걸어가니 해가 넘어갈 무렵에 의주 읍내가 멀리 보였습니다. 과연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죄어드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예로부터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에 달아드는 자는 아무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성문을 향하여 갔습니다.
성문에는 군인이 지키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통행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마침 변문에서 소를 몰고 돌아오는 사람들 틈에 끼여 지나갔습니다. 그곳에 있던 군인이 저에게 통행증을 요구하려는 차례가 되었을 때 세관원들한테로 갔습니다. 저는 요행히 몸집이 큰 소들의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관에서는 여행자들에게 한 명씩 세관장 앞으로 나아가 성명을 대라고 하였습니다. 날이 어두웠으므로 불을 켜놓고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관장 외에도 다른 세관원 한 사람이 높은 곳에 서서 혹시 누가 달아나는가 하여 두루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는 어떻게 처신하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한편에서는 이미 조사를 받은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기에 저는 슬그머니 그들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제 등 뒤에서 세관원이 저를 부르며 통행증도 내지 않고 가느냐고 호령하기에 저는 귀먹은 체하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연거푸 저를 부르기에 "무슨 말씀이오. 통행증은 벌써 내드렸습니다. "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이 저를 뒤쫓아오는 줄로 믿고 달아나 성 밖의 변두리로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저를 맞아줄 집이 한 채도 없었으므로 밤새도록 대략 백리를 걸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에 너무나 추워서 몸을 녹이려고 어떤 조그마한 주막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안에는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제 얼굴과 의복을 살펴보고 또 말소리를 들어보고는 외국 사람이라고 잘라 말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정체를 알아보려고 제 머리를 살펴보고 제가 신은 중국버선을 검사하였습니다. 한 사람만 저를 동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를 반대하여 제가 어디로 가든지 잡힐 것이라고 떠벌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백하고 또 조선 사람이니까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나의 근본이 변할 리 없다고 대답하고, 비록 잡힌다 할지라도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은 자기를 변호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마음은 편안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이 말을 듣고서 저를 집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들은 제 말을 듣고 제가 조선의 수도 서울, 즉 한양으로 가는 줄로 알고 간교하게도 뒤로 사람을 보내어 제가 가는 방향을 정탐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포졸들의 손아귀를 피하기가 지극히 어려웠고, 만일 잡히는 경우에는 제 몸에 지닌 돈만 보더라도 도둑의 혐의를 받아 사형을 받게 될 염려가 있었습니다. 도둑은 국법에 의하여 모두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정탐꾼이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서 그 사람들에게 제가 정말로 서울 쪽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 작은 주막을 멀리 피하면서 우회하여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뜬 다음에는 감히 길에 나서지를 못하고 수목이 울창한 산속에 숨어 있다가 해가 떨어져 어둠이 땅을 내리덮었을 때 걸음을 재촉하여 새벽 2시쯤에 의주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바다와 반대쪽에 있는 읍 왼편으로 방향을 정하여 길도 없는 험악한 곳을 헤매었습니다. 이런 곳에도 사방에 지붕이 보이기에 저는 국경 수비대로 여겼습니다.
제가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벌써 해가 떠올라 사방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첫째 강과 둘째 강을 건넌 뒤에 황막한 들길을 걸었습니다. 여기는 낮 동안 조선 사람들이 중국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길목이었습니다.
저는 걸어가는 도중에 중국 의복으로 갈아입느라고 나머지 한나절을 다 소비하였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약 백리 길을 걷고 나니 해가 떠올랐습니다. 계속 길을 걸어 저녁때가 지나 변문에 도착하여 모든 사람이 비웃는 가운데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느님과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으로 몇 가지 물건을 마련하고 5일 만에 백가점에 도착하여 공경하올 메스트르 신부님에게로 되돌아왔는데 이날이 1월 6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3월에 프란치스코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평온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사정은 신부님들의 편지를 보시면 더 자세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조선의 주요한 사람들이 편지를 보냈는데, 제 짐작에 그 편지를 신부님 앞으로 보냈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 편지는 몰리 신부님께로 보낸 것입니다(몽고 선교지의 장상인 몰리 신부님 집에 모방 신부님과 조선 선교지 책임자인 앵베르 주교님이 머물고 계셨습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전에 정성껏 저를 기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공경하올 스승님께, 순명하는 아들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 김대건 신학생의 여덟 번째 편지
발신일 : 1844년 5월 17일
발신지 : 몽고 소팔가자
수신인 : 리부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리부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5월 15일부로 신부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아주 반가운 마음으로 탐독하였습니다. 작년 음력 3월과 9월경에 장상(메스트르 신부)의 분부대로 저는 다시 변문으로 가서 조선에서 보내온 소식을 받아왔습니다.
조선에 있는 신자들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으나 목자들이 아니 계셔서 암흑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박해자인 대비(純元王后)는 아직 생존해 있고 왕(憲宗)은 정신병에 걸려 때때로 정신착란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지금 계획으로는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어떤 신자 가족을 의주(義州)로 이사시켜서 조선에 입국할 사람이 조금 더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해볼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심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날마다 입국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지극히 공경하올 페레올 고 주교님과 함께 몽고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2월 5일에 저는 공경하올 주교님의 사명을 받들어 북방을 통한 조선 입국의 길을 탐색하고자 약 두 달 동안 큰 장애 없이 모든 여정을 답사하고 돌아왔습니다.
만주어로 훈춘(琿春)이라고 불리는 홍시개 촌락은 우리가 체류하고 있는 소팔가자에서 2천 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훈춘과 영고탑 사이에 5백 리나 뻗어 있는 사막을 가로질러 가야 합니다. 이 사막에는 여관이 전혀 없는데 유목민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체류하면서 나그네들을 자기 움막에 유숙하게 합니다.
훈춘에서부터 조선 사람들의 도시와 집을 볼 수 있는데, 교역이 열리는 기간 외에는 일체의 교섭이 인정되지 아니합니다.
훈춘에서 8일을 묵고 안내자와 함께 조선인 도시(함경도 경원)로 가서 거기에서 조선인 연락원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선교사 신부님의 도착을 기다리며 한 달 이상을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의 서한에서 더 자세히 기록한 것을 보시게 될 것이므로 저는 존경하올 스승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지 아니합니다.
존경하올 스승님, 만일 가능하시다면 성경과 영신수련을 위한 매일 묵상 책과 보목(寶木 : 진품 십자가 나무조각), 상본, 특히 성모님의 무염시태 상본과 십자고상과 묵주 그리고 깃털 펜을 깎는 칼도 함께 보내주시기를 청합니다.
토마스는 이번에는 신부님께 편지를 올리지 못하여 엎드려 절한답니다.
공경하올 스승님께, 지극히 겸손하고 부당한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 김대건 부제의 아홉 번째 편지
발신일 : 1844년 12월 15일
발신지 : 몽고 소팔가자
수신인 : 페레올 주교
(이 편지는 김대건 부제가 한문으로 써서 페레올 주교께 올린 것인데 그 원본은 유실되고 고 주교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만 보존되어 있다. 이것을 달레 신부가 자신이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하였다.)
주교님께,
주님의 강복을 받고 하직한 후(1844년 2월 5일), 우리는 널빤지로 만든 썰매를 타고 눈이 쌓인 길을 빨리 달려 몇 시간 만에 장춘(長春)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그곳을 떠나 둘째 날 우리는 (큰 말뚝으로 울타리를 친 몽고와 만주 국경선) 장책(長柵)을 지나서 만주로 들어갔습니다. 넓디넓은 들판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서 어디를 보나 눈부신 단조로운 흰빛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썰매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기 위해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빠른 속력으로 사방으로 달리는 광경이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는 눈요기감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들판을 지나 처음 도착한 도시가 길림(吉林)이었는데, 그곳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성(省 즉 길림성)의 수도이고 장군 혹은 부도통(副都統)이 주재하는 도시였습니다. 길림은 송화강 동쪽 강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송화강은 2월의 추위로 아직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송화강 북쪽에는 큰 산맥이 서쪽에서 동쪽까지 뻗어 있는데 그 산봉우리들이 엷은 안개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 산맥이 북쪽에서 길림으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거의 모든 도시가 그러하듯이 길림에도 주목할 만한 볼거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벽돌이나 흙으로 짓고 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집들이 무질서하게 빽빽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이 초가집에서 지붕 위로 나오는 연기는 곧바로 올라가다가 얼마 안 되어 마치 푸르스름한 빛깔의 엄청나게 큰 망토처럼 퍼져서 온 도시가 감싸며 대기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만주인과 중국인이 섞여 살지만 중국인 수가 훨씬 많은 듯합니다. 이 두 민족을 합친 인구가 60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구조사라는 것이 이 나라에는 알려져 있지 않고 또 중국인의 첫째 특징이 과장하는 버릇이니만큼 주민의 실제 수는 어림잡아 거기에서 4분의 3을 빼야 할 듯합니다.
길림은 남쪽의 도시처럼 거리가 매우 붐비고 거래가 아주 활발하였습니다. 무수히 많은 종류의 짐승 가죽, 각계각층 여인들의 머리를 장식하는 여러 가지 가화(假花), 무명과 비단 옷감, 황제 소유의 산림(山林)에서 베어내는 건축용 목재 등의 집산지입니다.
길림에서 별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이 산림은 멀리 지평선에 그 시커먼 민둥민둥한 큰 봉우리가 눈이 부신 흰눈 위로 솟아 있습니다.
이 산림은 중국과 조선 사이에 넓은 장벽처럼 가로질러 있어서 두 나라 사이의 모든 교통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 장백산맥이) 조선 민족이 반도로 물러간 이래 줄곧 있어온 그 통한의 분열을 유지시키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이 산맥은 동서 길이가 6백 리 이상이 된다고 하는데 남북의 길이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산맥을 곧장 가로질러 조선을 향하여 직선으로 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여행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산맥은 통과할 수 없는 성벽처럼 우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멀리 돌아 영고탑 쪽으로 가서 개척된 길을 찾아야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고탑으로 가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당황하였습니다. 마침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를 도와주셔서 그 도시가 고향이라는 그 지방 상인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 얼마 동안 송화강 얼음 위로 그 강의 상류 쪽으로 올라갔습니다. 땅이 울퉁불퉁하고 산도 험악하며 수목도 울창하고 길도 없어서 여행자들은 강을 타고 다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송화강을 떠나 좀더 북쪽에 가서 본류와 합류하는 그 지류 중 하나에 접어들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이 지류를 목단강이라고 부르고 서양지도에는 후르시아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 말은 달단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강가에는 간간이 주막이 있었는데 하루는 신자의 주막을 만나게 되어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였습니다. 그 주막 주인이 우리를 형제처럼 후대했고 숙박비로 아무것도 받지 않을뿐더러 길 가다가 먹을 음식까지도 억지로 거저 주었습니다. 이것은 인정해야 할 중국인 교우들의 미덕입니다. 그들은 외국인과 그들의 형제들에게 지극히 너그럽게 대접해 보내는 것이 관습입니다.
우리는 그 주막을 떠나 덜 험한 길을 골라 가느라고 어느 때는 언강을 건너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강 오른쪽이나 왼쪽 기슭을 따라가기도 하였습니다. 좌우로 거대한 수목이 울창한 높은 산이 솟아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호랑이 ․ 표범 ․ 곰 ․ 늑대와 그 밖의 사나운 짐승들이 살고 있어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습격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적이 드문 무서운 산간 벽지를 혼자 지난다는 것은 미련한 짓이어서 얼마 못 가서 맹수의 밥이 되는 불행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번 겨울 동안만 해도 80명 이상의 행인과 백 마리 이상의 소와 말이 맹수한테 잡아 먹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인들은 무장을 단단히 하고 무리를 지어 다녀야 합니다. 우리도 역시 적을 압도할 만한 강대한 군대를 편성하여 행군하였습니다. 도중에 때때로 맹수들이 굴에서 나타났지만 우리 일행의 당당한 위용을 보고는 감히 덤벼들지 못하였습니다.
짐승들이 사람을 습격하니 사람들 역시 거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 맹수를 섬멸할 작전을 폅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황제가 많은 사냥꾼을 이 산림지대로 보내는데, 지난해에는 그 수가 5천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용감한 포수 중에는 언제나 그 용맹 때문에 생명을 대가로 치르는 자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나갈 때도 포수들이 동료 한 사람의 시체를 천리 밖에 있는 고향 땅, 조상의 묘지가 있는 데로 옮겨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싸움터에서 명예롭게 쓰러진 것입니다. 짐승을 잡은 보람이 있어 관 위에는 사슴뿔과 호랑이 가죽 등이 전리품으로 자랑스럽게 실려 있었습니다. 장례 행렬의 인도자는 한길에 종이로 만든 돈을 이따금씩 뿌리고 가는데, 죽은 자의 영혼이 그것을 주워 저 세상에서 쓴다는 것입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은 애석하게도 신앙과 선행만이 저 세상에서 가치 있는 유일한 돈인 줄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산림은 중국 황제만 사냥할 권리를 독점한 봉산(封山)입니다. 그러나 중국인과 조선인 밀렵꾼들이 이 산림에서 자기네 이익을 위하여 몰래 사냥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합니다.
이 산림 안에는 동편 바다로 통하는 길이 있는데 우리는 그 길에 다다르기 전에 넓이가 7,80리나 되는 작은 호수를 건너갔습니다. 그 호수도 또 그리로 흘러들어가는 강도 얼어 있었습니다.
이 호수는 황제가 사용할 많은 진주를 따내는 것으로 이 지방에서 유명합니다. 호수 이름은 흑호(黑湖)라고도 하고 진주문(珍珠門)이라고도 합니다. 여름에는 이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합니다.
우리는 진주문에서 나와 어떤 주막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중국인들의 제일 큰 명절이요 큰 잔치를 벌이고 즐겁게 노는 설날이 가까웠습니다. 여행자는 누구나 가던 길을 멈추고 설을 지내야 합니다. 주막 주인이 우리에게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장춘을 떠나서 훈춘으로 가는 길인데 그리고 가는 길을 몰라 걱정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그렇다면 여기서 설을 쇠고 가시오. 한 8일 후에 내 마차가 그리고 갈 예정이니 그때 당신들의 짐과 양식을 마차에 싣고 함께 떠나도록 하시오. 그 동안 대접은 잘해드리겠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우리 말들도 너무 지쳐서 며칠 동안 쉬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설날 명절 동안 외교인들은 이상한 미신행사를 합니다. 주막 사람들은 첫날밤을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자정 무렵이 되어 미신행사를 주관하는 제주가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제가 자는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저는 그의 뜻을 짐작하고 잠이 든 체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저를 깨우려고 여러 번 제 머리를 흔들어댔습니다. 저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체하며 “어쩐 일이오. 무슨 일이 생겼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일어나시오. 지금 귀신이 오십니다. 마중 나가야 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귀신이 와요? 대체 어디서 오는 무슨 귀신인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소. 귀신들, 큰 귀신들이 지금 오시려 합니다. 일어나서 마중 나가야 합니다.” 하여 제가 “여보시오. 잠깐 기다리시오. 당신도 보다시피 나는 지금 잠 귀신에 붙들려 있소. 지금 오는 귀신 중에 잠 귀신 만큼 이 시간에 나를 기분 좋게 해줄 만한 귀신이 또 있겠소? 제발 나를 이대로 잠귀신과 편안히 즐기게 내버려 두시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그런 귀신은 알지 못하오.” 라고 하였더니 제주는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면서 물러갔습니다.
아마 그는 큰 귀신들에 대하여 제가 공경심이 없는 것을 보고 저의 여행이 순탄치 못하고 무슨 불행한 일이 닥칠 주로 예측했을 것 같습니다.
귀신을 영접하는 예식은 이렇습니다. 자정이 되면 남자, 여자, 어린이, 노인 모두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마당 가운데 나가 서 있습니다. 예식을 주례하는 가장이 하늘을 사방으로 둘러봅니다. 그만이 능히 귀신을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나타나면 그는 이내 “귀신이 오신다. 모두 엎드려 절하여라. 바로 저쪽에서 오신다.” 하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모든 사라들이 즉시 그가 가리키는 쪽을 향하여 엎드립니다. 짐승의 머리와 수레의 앞쪽도 그쪽으로 향하여 돌려놓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들이 각각 제 나름대로 귀신들을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손님들이 도착할 때 그들이 말 궁둥이부터 보게 되면 불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신을 영접하고 나서 모두 집 안으로 들어와 귀신들을 위하여 성대한 잔치를 하며 즐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주문에서 8일을 묵고 나서 음력 1월 4일에 이제는 소용이 없게 된 썰매를 그곳에 버려두고 말 등에 안장을 얹고 주막 주인의 마차를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마차꾼들에게 약조한 삯을 지불하는 대신 산림을 지나가는 동안 우리 말들에게 여물을 주고 우리 식량을 운반해 주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산림 속에서는 몸을 녹이고 음식을 익힐 나무 밖에는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우리는 영고탑 근처에 있는 마첸호에 도착하였는데 여기서부터 6백 리를 가면 바다에 이르게 됩니다.
7,8년 전만 해도 이 길에 길손들이 유숙할 만한 주막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행자들은 무리를 지어 가다가 밤이 되면 그 자리에서 야영을 하는데 호랑이들을 쫓기 위하여 아침까지 모닥불을 꺼지지 않게 계속 피워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길가에 간간이 주막들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마치 미개인의 집처럼 나뭇가지와 둥치를 포개어 놓고 그 사이사이로 벌어진 커다란 틈은 진흙으로 메워 지은 커다란 움막집입니다. 여인숙을 짓고 연기에 그을린 이들 숙소에 살면서 주인 노릇을 하는 두어 명의 중국인을 이 지방 말로 광군자, 즉 가족 없는 독신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대부분이 먼 곳에 있는 아버지의 집을 뛰쳐나와 약탈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겨울에만 여기서 살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초막을 떠나 산림으로 가서 밀렵을 하거나 산삼을 찾아다닙니다. 중국에서 산삼은 같은 무게의 금값의 곱절이나 비싸게 팔리는 귀중한 풀뿌리입니다.
이 초막은 겉도 초라하지만 그 안은 더 더럽습니다. 한가운데는 세 개의 돌 위에 올려놓은 큰 솥이 있는데 이것이 이 식당의 유일한 식기입니다. 그 밑에다 불을 때면 연기가 제멋대로 흩어집니다. 사방 벽에 붙은 그을음이 어떨지 상상해 보십시오.
사냥할 때 쓰는 총과 칼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시커멓게 그을린 통나무 벽에 걸려 있습니다. 방바닥에는 나무껍질이 깔려 있습니다. 길손은 이 위에서 지친 몸을 쉬고 여행을 계속하기에 필요한 기운을 얻게 됩니다.
어떤 때는 백 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빽빽하게 거의 포개 잔 적도 있습니다. 저는 연기 때문에 질식할 것만 같아 가끔 밖에 나가 찬 공기를 마시고 숨을 돌려야 하였습니다. 아침에는 밤사이에 들이마신 그을음을 뱉어내야 하였습니다.
광군자들은 손님에게 물과 잠자리밖에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길손들은 여기에서는 돈도 통용되지 않고 은이 뭔지도 모릅니다. 주막 주인들은 손님들을 재워주는 대신 쌀과 좁쌀, 증기로 찌거나 재 속에 넣어 구운 작은 빵, 고기, 옥수수, 술(고량주) 따위를 받습니다.
짐을 운반하는 말들은 바깥에 매어두는데 그것들을 탐욕스러운 늑대와 호랑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보초를 서야 합니다. 말들이 겁에 질려 울거나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세차게 헐떡거리면 맹수들이 가까이 온다는 신호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횃불을 켜들고 징을 치고 고함을 질러 짐승들을 쫓곤 하였습니다.
이 산림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나무들이 굵고 키가 굉장히 큽니다. 산림 가장자리에서만 도끼로 나무를 찍어내고, 안쪽에서는 나무들이 늙어서 쓰러질 뿐입니다. 그 나뭇가지에는 새들이 많이 모여 삽니다. 새 중에는 새끼 사슴을 채가는 굉장히 큰 새들도 있다는데 그 새의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특히 꿩이 아주 많습니다. 얼마나 많은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독수리와 매들이 꿩을 잡아먹느라고 사납게 싸우기도 합니다. 하루는 이 사나운 새 한 마리가 불쌍한 꿩을 덮치는 것을 보고 쫓았더니 그놈이 꿩 대가리만 물고 달아나는 바람에 나머지는 우리 차지가 되었습니다.
훈춘까지 하룻길밖에 남지 않았을 때 우리는 무거운 짐을 실은 마차를 앞질러 갔습니다. 드디어 주교님을 하직한 지 한 달 만에 여행의 목적지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초소를 하나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훈춘은 바다에서 별로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조선과 만주를 가르는 두만강 어귀에 있습니다. 그곳은 백 가구 가량의 달단인들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촌락입니다. 조선인과 중국인이 접촉할 만한 지점은 남쪽에 있는 봉황성(鳳凰城) 변문 외에는 오직 이 훈춘뿐입니다.
만주 출신의 2품 관장이 그 휘하에 2,3백 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치안을 맡고 있습니다.
많은 중국인이 아주 먼 데서부터 이리로 교역을 하러 옵니다. 그들은 조선 사람들에게 개 ․ 고양이 ․ 담뱃대 ․ 사슴뿔(녹용) ․ 구리 ․ 말 ․ 노새 ․ 나귀들을 주고, 그 대신에 바구니 ․ 가재도구 ․ 쌀 ․ 밀 ․ 돼지 ․ 소 ․ 종이 ․ 돗자리 ․ 가죽 제품 그리고 빠르기로 이름난 조랑말들을 받습니다.
이러한 거래는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는 2년에 한 번씩, 그나마도 한 나절밖에 열리지 않습니다. 상품 교환은 훈춘에서 40리 떨어진 조선의 제일 가까운 도시인 경원(慶源)에서 행하여집니다.
만일 밤이 가까워도 중국인들이 국경을 넘어 돌아가지 않으면 조선 군인들이 허리에 칼을 갖다 대고 쫓아냅니다.
봉천 ․ 길림 ․ 영고탑 ․ 훈춘의 관장들에게는 좀 더 자유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해마다 5일 동안 교역을 할 수 있는 허락이 내립니다. 그러나 엄중한 감시를 받고 밤에는 조선땅 밖에서 지내야 합니다.
관장들은 각기 장교 5명씩을 거느리고 또 장교는 각기 5명씩의 중요한 상인들을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하나의 조그마한 대상(隊商)을 이루게 됩니다. 그들은 산림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전에 산꼭대기에 올라가 천막을 치고 돼지를 잡아 산신에게 고사를 지냅니다. 모두가 이 제물에 추렴을 내고 동참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마다 교역하는 몇 시간 동안만이 중국인과 조선인이 접촉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다른 때는 어느 쪽에서든지 국경을 넘는 사람은 잡혀서 종이 되거나 가차 없이 살해됩니다.
이 두 민족은 서로 대단히 미워합니다. 더구나 근년에 중국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어린이들과 여자들을 납치해 간 후로는 훨씬 더 심하다고 합니다. 저는 어떤 주막에서 어릴 적에 부모의 품에서 납치되어 온 조선 젊은이 한 명을 만났습니다. 그는 20새쯤 되어 보였습니다.
그에게 고향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함부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중국인으로 여기고 목을 자를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조선말을 좀 해보라고 권하였더니 자기는 벌써 모국어를 잊어버렸고 또 제가 그 말을 못 알아들을 것이니 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제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짐작도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훈춘은 제국 전체로 확산되고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장사로 유명합니다. 그것은 해안에서 멀지 않은 동해에서 다는 해초 장사입니다. 해초를 따는 사람들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자루 같은 것을 허리에 차고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해초를 자루 가득히 따면 물 밖으로 나와서 쏟아놓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서 배가 가득찰 때까지 따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이 해초를 몹시 좋아하며 많이 소비합니다. 길에서 해초를 가득 실은 마차의 대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선 국경에 도착하였을 때는 시장이 서기까지 8일이나 남았습니다. 그때까지 시간이 너무나 지루하였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조선의 신자들을 약속한 표지로 알아보고 그들과 대면하게 되기를 마음 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아! 이 백성들은 아직도 외국인을 보면 원수로 여기고 무서워하면서 국경 밖으로 내쫓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야만 상태에 있구나.’ 하고 탄식하였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다만 며칠을 지내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저는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제가 중국에서 용납되는 것은 사람들이 저를 중국인으로 알기 때문이었고, 잠깐 동안이나마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외국인의 자격으로서였습니다. 아! 인류 대가족의 공동의 아버지께서 천주 성자 예수님이 전인류에게 전하여 주러 오신 무한한 사랑 안에 모든 자녀를 포용할 날이 언제쯤 오겠습니까!
제가 떠나기 전에 주교님은 제가 지나가게 될 지방에 대한 실정을 파악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저는 주교님의 뜻을 따르려고 힘썼습니다. 제가 직접 관찰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며 어릴 적 조선 서당에서 배운 기억을 더듬기도 하여 이 지방 여러 가지 실정을 종합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대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지방 본래의 만주인들은 제가 가지고 있는 서양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것보다 덜 넓은 지역에 퍼져 있습니다. 그들은 북위 46도 이북에는 거의 살고 있지 않습니다. 서쪽으로는 몽고와 갈라놓는 장책과 송화강이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우킨과 유피타체, 즉 물고기 가죽을 입고 사는 달단인들의 두 작은 나라로 경계가 되며, 동쪽으로는 동해로 경계가 되고 남쪽으로는 조선과 경계가 되고 있습니다.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한 이후 이들 나라는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자들이나 사람 하나 만날 수 없는 광대한 산림지대가 이 땅의 일부분을 덮고 있고, 나머지 지역에는 서로 상당히 먼 거리를 두고 소수의 달단인 가족들이, 이를테면 주둔군처럼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들 가족은 황제의 비용으로 살아가며 농사짓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살고 있는 목적은 북방 산림 속에 널리 퍼져 살고 있는 몹시 겁이 많은 토착민들에게 ‘내려오지들 말아라. 이 나라는 우리가 차지하고 있다.’ 고 엄포를 놓고 파수를 보면서 사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지방에서 경작을 금하는 국법을 어기고 이곳저곳을 약간씩 몰래 개간하여 농사짓는 중국인들은 살아가기에 필요한 곡식을 달단인들에게 팝니다. 그들에게는 달단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아서 그들 대부분은 가족이 없습니다.
만주 벌판에 자라는 풀이 사람의 키가 넘게 무성한 것을 보면 이 땅이 매우 비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옥수수 ․ 조 ․ 메일 ․ 밀 등을 생산하며 밀의 소출은 매우 적습니다. 땅이 축축하고 안개가 자주 끼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교님은 만주가 인적이 끊어진 적막한 고장이 된 원인을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현재의 중국 왕조(淸)의 창시조는 그가 정복하는 곳마다 자기의 원래 백성을 침입한 땅에 옮겨 살게 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그가 중국에 쳐들어가면서 모든 군인과 그 가족, 그러니까 온 백성을 이끌고 간 것입니다.
그 중 일부분은 요동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중국의 주요한 도시에 분산시켜 놓았습니다.
각 도시에 만주족을 이주시킴으로써 그 도시의 점령을 확실하게 하는 동시에 중국인들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할 책임을 지움으로써 왕권을 견고히 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국인과 만주인이 2백년이 넘도록 같은 성안에 살고,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도 아직도 두 민족은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두 민족은 각기 자기네 혈통을 보조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막에 들어가서 낯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당신은 명(明)인가요? 기(旗)인가요? 즉 당신은 중국인인가요? 만주인인가요?” 하는 것보다 더 흔한 질문은 없습니다. 명, 즉 중국에 명조라는 말은 중국인을 뜻합니다. 그리고 기, 즉 만주의 깃발이라는 말은 만주인을 뜻 합니다.
만주인은 원래 8개의 부족으로 나누어 있었고 부족마다 각기 다른 깃발 아래 모여 살면서 그 깃발의 이름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만주인은 민족 문학이 없습니다. 만주어로 쓰여진 책들은 예외 없이 북경에 설치된 특별한 관청에서 중국 서적을 번역한 것입니다. 만주족은 고유한 문자조차 없는 몽골인의 글자를 빌려 쓰고 있습니다.
만주어는 모르는 사이에 소멸되어 그 말을 하는 사람들도 아주 적습니다. 앞으로 한 백년만 지나면 그 말은 책 속에서 과거의 추억으로 밖에는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만주어는 우리 조선말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 수백 년 전에 조선이 만주인의 나라에까지 국경을 넓혔을 때 두 민족이 조선인의 후예임을 증명하는 족보를 경건하게 보존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또한 조선의 무기와 돈, 그릇과 책이 들어 있는 무덤이 있습니다.
앞에서 우킨과 유피타체(달단족)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그들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정보를 알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유피타체는 물고기 껍질로 만든 옷을 입고 살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어피달자(魚皮撻子)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송화강과 그 지류 강변 지방에서 살거나 산림을 돌아다니면서 고기잡이와 사냥을 하고 삽니다. 그들은 짐승의 가죽과 물고기를 중국인들에게 팝니다. 장사는 겨울에 하는데 그때에는 물고기가 얼기 때문에 2천 리 이상이나 멀리 떨어진 시장에까지 공급이 됩니다.
어피달자들은 그 대신에 옷감과 쌀, 좁쌀로 빚은 소주를 받습니다. 그들은 고유한 방언을 쓰며 중국 황제에게 독립되어 있고, 그들 지역에는 외국인들을 들이지 않습니다.
중국인들은 그들이 구역질 날 정도로 더럽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을 이렇게 비방할 권리를 가지려면 비난하는 자신이 좀 더 속옷을 자주 갈아입고 득실거리는 이를 없애야 할 것입니다.
유피타체들이 살고 있는 지방을 넘어서 아시아의 러시아 영토(시베리아) 국경까지 또 다른 유목민들이 살고 있다고 추측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저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부족이 사는 남쪽 바다 쪽으로 통하는 사이에 다체수(間島) 라고 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이 지방에 얼마 전부터 중국인과 조선인 유랑민들이 모여들었고 지금도 날마다 모여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독립정신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 범죄로 인하여 받아야 할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빚쟁이의 추격을 피하여 이곳에 모여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도둑질과 범죄에 길이 들어 도덕도 없고 원리원칙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들이 자기들의 무질서한 생활상태를 개선하고 좀더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두령을 뽑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은 생매장을 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는데 그들의 두령까지도 이 법을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여자가 없기 때문에 어디서건 여자를 만나면 납치하여 아내로 삼는다 합니다. 이 지역은 고대 로마 초창기와 비슷한 데가 있는데 이 지역이 과연 로마처럼 발전을 이룩할 것인지는 장차 두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선 국경에서 멀지 않은 산림 가운데 태백산, 즉 백두산이 구름위에 솟아 있습니다. 이 산은 지금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청조(淸朝)의 시조인 한황(汗王 누르하치)의 탄생지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유명합니다.
그 산 서쪽 비탈에는 그의 옛 집이 보수되어 보존되어 있는데 중국인들은 그곳을 종교적 예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주 먼 지방에서 경건한 순례자들이 와서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조아립니다.
한왕의 내력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처음에는 도둑의 두목으로서 그 근처 지방을 두루 약탈하였는데 수하에 수많은 도당을 거느리게 되자 왕권의 기초를 세웠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의 명예를 존중하여 그가 달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작은 부족의 추장이었는데 그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늘려서 오늘과 같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기원이 어떠하든 간에 한왕은 중국의 명조(明朝) 말엽에 이르러서 명의 마지막 황제의 하나인 만력황제(萬曆皇帝)가 크게 두려워할 만큼 강대해진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만력황제는 한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의 나라를 위협하는 몽고의 침입을 방어한다는 핑계로 한왕한테 그의 군사 중에서 정병을 뽑아 보내주도록 청하였습니다. 만력황제는 한왕의 부하들이 자기의 수중에 들어오자 그들을 모두 죽여 버렀습니다.
한왕의 부하 중 한 사람만이 인물이 잘난 관계로 중국의 어떤 대관의 보호를 받아 살아남아서 그의 하인이 되었는데 차차 주인의 신임을 크게 받아 그 집의 관리인이 되었답니다.
얼마 후에 다른 대관 한 사람이 그 집에 왔다가 이 만주 청년을 보고 그의 동료 대관에게 이 청년을 살려준 것은 황제의 진노를 받을 위험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대관은 그 청년을 고발할 것이니 우선 지금은 즐겁게 잔치나 하자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런데 청년이 이 말을 엿들었습니다. 청년은 앞날이 염려되어 즉시마부에게 중대한 임무가 생겼다고 하고 주인의 말 중에서 제일 좋은 말을 골라 안장을 없어놓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말 준비가 다 되자그 청년은 말에 올라타고 전속력으로 백두산으로 달려가서 한왕에게 중국 황제의 배신과 동료들이 당한 참변을 낱낱이 고하였습니다.
한왕은 크게 분노하여 즉시 10명의 아들 중 맏아들에게 군대를 주어 급히 봉천을 점령하라고 명령하였답니다. 그 당시 봉천은 벌써 중국인들이 조선의 세력을 물리친 다음 요동의 수부로 정한 곳이었습니다.
한왕의 아들이 봉천에 당도하여 적의 진용이 강대함을 보자 공격할 마음도 먹지 못하고 되돌아왔습니다. 한왕은 아들의 비겁함에 크게 노하여 자기 손으로 그를 죽여 버리고 가족과 부하 전부를 거느리고 봉천으로 진격하였습니다.
봉천 주민들은 크게 무서워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한왕은 봉천을 자기의 왕도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명 황제의 궁중에서는 내관으로 있던 왕씨와 두씨가 그 당시 만력황제의 후계자이던 숭정황제(崇禎皇帝)를 거슬러 반역을 일으켜 다른 이를 왕좌에 앉혔습니다. 숭정황제는 극도로 실망하여 매산에 올라가 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이 나무는 오늘까지 보존되어있는데 중국 사람들은 그 나무를 크게 숭배합니다. 그들은 그 나무가황제의 죽음으로 거룩한 나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명의 왕좌에 오른 이자성(李自成)이라는 자는 추앙왕으로 불렸습니다. 이자는 지혜롭지 못하여 당시 세력이 큰 대관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오삼계(吳三桂)라는 이 대관은 그 강탈자를 응징하기 위하여 봉천의 새 왕에게 협력을 청하였고 추앙왕은 겁이 나서 남방 어느 시골로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교활한 한왕은 둘째 아들 순치를 북경으로 보내어 점령하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달단 만주 왕조, 즉 청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순치(順治) 황제의 아들 강희(康熙) 황제 시대에는 중국 전체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들어올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런 희망은 없어지고(중국 제사문제 때문에) 그 후계자들인 옹정(雍正) 황제, 건륭(乾隆) 황제, 가경(嘉慶) 황제, 도광(道光) 황제 시대에는 그리스도교가 다소간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제 제 여행 이야기를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음력 1월 20일에 조선 경원의 관장이 그 이튿날 교역을 개시한다는 통지를 훈춘으로 보내왔습니다. 저는 일행과 함께 해가 뜨자마자 급히 서둘러 시장으로 갔습니다. 읍내 어귀에는 많은 사람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손에 흰 수건을 들고 허리띠에는 붉은색 조그만 차주머니를 차고 군중 가운데로 걸어갔습니다.
이것은 조선 연락원들이 우리를 알아보도록 약속한 표였고 그들이 그 표를 보고 우리에게 다가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읍내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여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여러 시간이 헛되게 흘러갔습니다. 우리는 불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와 만날 약속을 어긴 것일까?” 하는 걱정스러운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읍내에서 3백 보쯤 떨어진 냇가로 갔는데, 낯선 사람이 우리의 표를 보고 가까이 왔습니다.
제가 중국말로 말을 걸었더니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선말로 “당신 이름이 무어요?” 하고 물었더니 “나는 한서방이오.” 하고 대답하여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요?” 하자 “그렇소.”하고 말하여 저는 일단 성공했다고 한숨 놓았습니다.
그가 우리를 자기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들 일행은 4명이었는데 거기서 우리를 기다린지가 한 달이 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이 둘러 있어서 오랫동안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가련한 신자들은 슬픔으로 낙담하는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였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 풍기는 묘한 분위기 때문에 외교인들의 호기심을 끌었습니다.
우리는 외교인들이 우리 이야기에 주의를 덜 기울이는 틈을 타서 재빨리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몇 마디하고는 다시 가축 흥정을 하는 척하였습니다. “이것 얼마 받겠소?”, “80냥이오.”, “그건 너무 비싸오. 자, 50냥 줄 터이니 당신 가축을 팔고 가시오.”, “안 될 말씀이오. 조금이라도 덜 주겠다면 안 팔겠소.” 이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조선 신자들로부터 박해가 멎은 다음 조선 교회는 비교적 평온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박해의 폭풍우가 덜 몰아친다고 생각하는 남쪽 지방으로 피신한 신자들도 많고, 천주교에 입교한 가족들도 많다고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서양 선교사를 오랫동안 그들의 집에 모셔두기는 어려운 실정이지만 하느님의 인자하심에 의지하여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답니다.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모셔 들이는 데는 훈춘보다 변문이 덜 위험할 것이랍니다. 왜냐하면 훈춘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들어오면 국경을 넘어오는 위험 외에도 조선(함경도) 전체를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끝마치고 우리는 이별하려고 손을 마주잡았습니다. 그들이 흐느껴 울어서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우리는 다시 읍내로 들어와 군중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경원 시장의 풍경은 이상하였습니다. 장사꾼들은 도착하는 즉시 상품을 벌여놓으면 안 되고 장을 연다는 신호를 기다려야 합니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 정오가 되면 깃발을 올리고 징을 칩니다. 그러면 그 당장에 어마어마한 군중이 빽빽하게 장터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조선인 ․ 중국인 ․ 만주인 등 모두가 함께 엉키어 각기 자기 나라말로 귀가 아프도록 소리소리 지릅니다. 이들 장사꾼의 부르짖음이 얼마나 요란스러운지 맞은편 산에서 메아리가 울려올 지경입니다.
사고 팔라고 허락된 시간은 네다섯 시간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 여기저기서 다투는 소리, 서로 주먹으로 치고받는 육박전, 흉기를 들고 강탈하는 놀라운 광경 등 과연 이때의 경원은 시장이라기보다는 마치 화적이 습격하여 약탈하는 참상을 연출하는 듯합니다.
저녁이 되면 외국인들은 돌아가라는 신호를 내립니다. 그러면 군중은 또다시 뒤죽박죽이 되어 무질서하게 물러납니다. 군인들은 뒤처진 자들을 창끝으로 밀어냅니다. 우리는 이 혼란한 군중 속에서 헤어나는데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훈춘으로 돌아가려는 참에 조선 교우들이 다시 우리에게로 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들은 차마 떠나지 못하고,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동행이 그들과 몇 마디 말이라도 좀 더 나누려고 말에서 내렸습니다. 저는 주위에 있는 포졸들이 우리를 장사꾼이 아니라 다른 일로 온 사람들로 의심할까 두려워서 동행에게 다시 말에 오르라는 눈짓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교회를 수호하는 천사에게 경의를 표하고 조선순교자들의 기도에 의탁하면서 두만강을 건너 달단 지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얼음 위를 미끄럼 타며 왔던 강이 한창 녹고 있었습니다. 높은 산 위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울로 인하여 물이 불은 강에는 잡동사니와 묵은 나무등걸과 굉장히 큰 얼음덩어리들이 마구 뒤섞여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여행자들이 마차를 끌고 자꾸만 모여들어 강가가 혼잡하였습니다. 군중이 외치는 소리와 맹수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강물이 흘러내리는 요란한 소리가 한데 뒤섞여 산골짜기를 괴상하고 무시무시한 광경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무도 이 위험한 강물 가운데로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해마다 이 강을 건너다가 얼음 밑에 깔려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여 주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저는 건너갈 만한 곳을 찾아서 강을 건넜습니다.
저의 동행은 좀 더 신중해서 물길을 잘 아는 안내인을 고용하여 멀리 돌아서 무사히 건넜습니다. 우리는 말 한 필을 잃어버린 손해밖에는 보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께, 지극히 순종하고 부당한 아들 김해 김 조선인 부제가 절합니다.
● 김대건 부제의 열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3월 27일
발신지 : 서울
수신인 : 리부아 신부
리부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신부님이 아시는 바와 같이 작년에 지극히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을 모시고 몽고를 출발하여 변문까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조선에서 온 신자들이 이미 도착하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교님께 담당 선교지인 조선에 입국하는 데는 난관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교님은 저를 먼저 조선에 파견하시어 제가 조선의 정세를 살펴보고 그 가능성 여부에 따라 주교님의 입국을 주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페레올 주교님의 강복을 받고 한밤중에 신자들을 따라 출발하여 해질 무렵에 의주 읍내가 바라보이는 곳까지 왔습니다.
거기에 이르러 연락원들에게 어떠어떠한 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으라고 약속을 하고서 연락원들을 앞세워 보내고 저 혼자 의주에서 20리가량 떨어진 산골짜기를 찾아들어 울창한 숲속 어둠침침한 나뭇가지 밑에 몸을 숨겼습니다.
사방에 눈이 쌓여 산촌이 모두 하얗고 싸늘한데 밤이 되기를 기다리자니 어찌나 지루한지 묵주의 기도를 수없이 거듭하였습니다.
해가 지고 친지가 어둠에 잠겼을 때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그곳을 떠나 읍내를 향하여 가는데 발소리마저 없이 하려고 신발을 벗고 걸어갔습니다.
강을 건너고 길도 아닌 험한 곳을 달려갔습니다. 어떤 곳은 눈이 다섯 자 혹은 열 자나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제가 겨우 약속하였던 곳에 이르러 보니 신자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걱정이 되고 근심이 되어 두 번이나 읍내로 들어가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헛일이었습니다.
결국 약속한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밭에 앉아 있자니까 처량한 생각이 소용들이치기 시작하여 몹시 심란해졌습니다. 연락원들이 잡힌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이곳에 오지 못하는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연락원들이 절실히 필요한 이때에 저 혼자서 여행을 계속하여 서울로 가자니 극히 위험할 뿐 아니라 여비도 없고 옷도 없고, 그렇다고 중국으로 되돌아가자니 그것 역시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모셔올 길이 아주 끊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추위와 굶주림, 피로와 근심에 짓눌려 기진맥진하여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거름더미 옆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고대하면서 먼동이 틀 때까지 녹초가 된 채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저를 찾아다니던 신자들이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저보다 먼저 와 있었는데 저를 만나지 못하자 되돌아갔다가 두 번째 온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얼마 동안 기다려도 제가 오지 않으니까 모두 걱정을 하면서 5리나 나가서 찾아보아도 찾지 못하여 근심으로 밤을 지새운 뒤 절망하고 낙심천만하여 돌아갈까 하던 참에 저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에 넘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신자 일곱 명이 말 두 필을 끌고 서울을 떠났는데 중간에 오다가 네 명은 신부님들을 영접하는 어려움과 위험 때문에 낙심하여 뒤에 떨어지고 세 명만 변문까지 왔던 것입니다. 현 가롤로(玄錫文)와 이 토마스(李在誼)와 두 명의 하인은 끝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해가 뜬 뒤에 신자 두 명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뒤 따라오도록 남겨두고 저는 한 명만 데리고 의주를 떠났습니다.
저는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30리를 겨우 걸은 다음 주막에 들어가 밤을 지냈습니다.
이튿날 말 두 필을 세내어 타고 닷새 만에 평양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말 두 필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던 현 가롤로와 이 토마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모두 함께 길을 떠나 7일 만에 수도, 즉 한양에 도착하여 신자들이 마련해 둔 집에 들어갔습니다.
신자들의 호기심과 수다스러움과 위험을 염려하여 필요한 신자 몇 명 외에는 아무에게도 저의 귀국에 대해 알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조선에 돌아왔다는 말을 저의 어머님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당부하였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미 우리가 마카오로 간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귀국하는 대로 즉시 잡아 죽이도록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방안에 갇혀 있은 지 며칠이 지나니까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근심 걱정이 저를 괴롭히더니 마침내 병에 걸렸습니다. 마치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듯이 가슴과 배와 허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독히 아팠습니다. 때때로 심하게 아프다가 좀 낫기도 하고, 이렇게 한 보름 넘게 앓았습니다. 저는 병을 고치기 위하여 신자 의원과 외교인의원을 청하여 그들이 주는 여러 가지 약을 먹었습니다.
지금 병은 다 나았으나 몸이 허약하여 글씨를 쓸 수도 없고 다른 것을 원하는 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한 20일 전부터는 눈병까지 생겨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련한 처지의 허약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도우심과 자비를 의지하여 페레올 주교님과 선교사 신부님들을 영접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가롤로(현석문)를 충청도로 보내어 해변에 집을 마련하라고 하였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집 한 채와 배 한척을 샀는데 그 값이 은 백 46냥이었습니다.
이제 중국 강남성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참입니다. 그러나 신자 뱃사공들에게는 미리 겁먹을까 봐 염려되어 어디로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모두 신자이기는 하지만 매우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먼 바다에 나가본 적도 없고 또 배를 조종할 즐도 모르는데다 항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항해술이 능통한 것처럼 이야기하며 설득시켰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사이에 약조한 것이 있습니다. 즉 조선 배가 국경을 넘어 중국측 해안에 들어가면 중국에서 그 배에 탄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는데, 만일 조사해 보고 죄가 있을 경우에는 죽이도록 되어 있고 또 중국 배에 대하여도 조선에 오면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 대한 경의와 인자하심을 기억하시는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가 무사히 강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게 해주실 줄 희망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스승님께 몇 가지 청할 것이 있는데 혹 저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신다면 컴퍼스, 먹 없이 글씨를 쓸 수 있는 검은색 철필, 세계지도, 특히 황해와 중국과 조선의 해변을 자세히 그린 지도, 그리고 눈을 보호하는 중국식 녹색 안경을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지극히 공경하을 스승님께, 무익하고 지극히 부당한 종 김해 김 안드레아 올립니다.
추신 :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斑點)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天然痘)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명확하게 적어 보내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
● 김대건 부제의 열한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4월 6일
발신지 : 서울
수신인 : 리부아 신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리부아 신부님께
공경하올 신부님 제가 중국에 있을 때 몇몇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말로는 조선에 계신 신부님들이 포졸들에게 자수한 것은 올바르게 행한 것이 아니었고, 또 신자들이 배반자를 제외하고 마치 신부님들을 경멸하고 저버린 사람들처럼 비난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들과 신자들이 처해 있던 주변 환경이 어떠했는지를 주목하고 인식한다면 어김없이 그들의 운명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신부님들은 체포될 위험에 놓여 있었고, 또 탈출하기가 윤리적으로 불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박해와 굶주림에 억눌려 있었고 그들은 거의가 집도 없이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다가 체포되어 몰살당하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교인과 포졸까지도 신자들을 동정할 정도였습니다.
신부님들은 모두 신자들을 위해서 계셨고, 또 신자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모두가 신부님들을 위해서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신자들의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열성적으로 돌보았습니다. 또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보호하려고 힘껏 애썼습니다.
신자들은 가능한 한 신부님들을 숨겨드리려 하였고 신부님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각오까지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자진하여 포졸들에게 가셨고 또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한사코 만류하지 않았으며, 어떤 신자들은 포졸들이 오기 전에 앞질러 떠나기도 하였음을 저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달리 행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다지도 좁디좁은 왕국에서 조정은 신부님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고, 주교님은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어 신부님들을 부르셨습니다. 포졸들이 사방에 깔려 신부님들을 수색하였습니다. 주교님은 불가피한 사정에 몰려 당신의 사랑하는 신부님들을 최후의 형장에 속히 오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신부님들은 주교님의 명령에 순명하였고 또 탈출할 수도 없었습니다. 물론 신부님들은 일시적으로 피할 수는 있었겠지만 당신들이 구하려고 온 자기 양들을 위하여 많은 환난을 무릅쓰고 죽음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판단으로는 그것은 과오가 아니라 덕행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은 신부님들의 명령에 순종하여 포졸들을 찾으러나갔습니다. 신부님들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랐음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당신의 제자인 유다에 의하여 넘겨졌고, 신부님들은 그들의 제자인 신자에 의하여 넘겨졌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죽음을 향해 가졌고, 신부님들은 주교님께 순종하시어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떠나가셨고, 신부님들은 최후의 만찬으로 미사성제를 봉헌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양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맡기셨습니다.
이처럼 신부님들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신을 최고의 형벌에 내맡겼습니다. 신부님들은 신자들이 사제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고 또 그들의 목숨이 귀중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부님들은 당신들이 죽은 다음에 미래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으며 목자 없는 양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장차 이리와 늑대들이 주님의 양떼를 잡아먹으리라는 것을 예견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죽음의 길로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몰려와 슬픔에 젖어 목자들을 바라보면서 자기들을 고아로 남겨놓고 죽음의 길로 떠나가지 말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어머니와 같은 애정으로 성서의 말씀을 들려주면서 그들을 위로하였고, 자기들은 웃어른의 명령으로 죽음의 길로 간다고 타일렀습니다.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자기들도 신부님들을 따라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눈물로 애원하였으나 그리하도록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신부님들은 미사성제를 봉헌한 다음 길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양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제는 더 이상 목자들을 뵐 수 없게 되었음을 통곡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이 떠나자 신자들은 비록 몸은 함께 가지 못할지라도 마음은 신부님들과 결합되어 있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정신을 가다듬어 장차 닥쳐올 사태를 기다리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포졸들은 신부님들을 보자 관례를 벗어나 부드럽게 대하였고 예의바르게 하였습니다. 관장들도 많은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대우를 잘해 주였고 감시를 하지 않았으며 어디를 가든지 허락하였습니다. 밤에도 포졸들이 신부님들을 매우 신임하여 마음놓고 편안히 주무실 수 있도록 그들은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모두 제공하였고 말에 태워 조심스럽게 끌고 갔습니다.
서울에 끌려온 신부님들은 존경하을 주교님을 뵙고 나서 모두 의금부(義禁府)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문을 많이 받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잘 참아냈고 지극히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주 그리스도를 용감히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저버리라는 경고를 받았지만 더욱 큰소리로 하느님을 증언하였고, 신자들을 신고하라는 강요를 당하였으나 이를 무시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또다시 참을 수 없는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형벌을 극복하고 사형을 선고받아 1839년 9월 21일에 거룩한 피를 흘려 순교함으로써 하늘나라로 개선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
신부님들이 돌아가신 후에도 신자들은 2년 동안 박해에 시달렸습니다. 마지막 박해가 4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그 동안 신자들은 비참과 가난에 쪼들려 이루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하게 되었었을 뿐 아니라 박해와 무수한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4년 전부터 박해가 멈추었지만 아직도 평온한 상태는 아닙니다.
지금은 신자들을 죽이려는 적극적 박해는 없지만 신자들은 예전보다도 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집이라는 것이 알려지기만 하면 포졸들이 즉시 그 집을 점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당하고 난 후라 맥이 빠지고 열성이 식어 대다수가 냉담자들이 되었는데 예전과 같은 열성적 상태로 돌아올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전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점차 열성이 오르고 그 수도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배교자들이 참회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외교인들에게 설교한 사람이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오류를 버리고 가톨릭 종교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되려는 외교인들이 많지만 신자들은 박해가 무서워서 감히 자진하여 그들에게 종교를 전하려는 엄두를 감히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의 종교를 찬양하고 그 종교가 참된 종교임을 고백하면서 박해가 없었더라면 자신들도 신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오로지 박해가 무서워서 감히 귀의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포졸들은 서로 다음과 같이 수군거립니다.
"만일 박해가 없었더라면 누구라도 송아지 새끼가 아닌 이상 천주교신자가 되기를 마다 할 사람은 없을 거야."
"천주교는 참으로 훌륭한 종교이기는 한데 우리가 만일 신자가 되면 우리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군. 온갖 모욕을 참아내고 언제 어디서나 겸손하여야 한다네. 자기 자신과 사물을 경시하며 모욕을 받더라도 보복을 해서는 안 된다네."
"신자가 되면 세속적인 것은 아무것도 행하지 못한다니 사람이 무슨 재미로 살겠나? 이로울 건 아무것도 없고 비참할 뿐이겠지“
일반적으로 외교인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정직하다고 알고 있고 신자들의 비참을 동정합니다. 그리고 박해 때는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외교인들은 어떤 좋은 것이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면 "필시 천주교 신자의 소행일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외교인들끼리도 어떤 것을 올바로 행하면 "자네도 천주교 신자인가? 왜 그렇게 올바르게 행동하려고 하나?"라고 농담을 합니다.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을 죽인 왕후(貞純王后)를 제외하고는 조선에서는 종교를 적극적으로 박해한 임금님이 없었습니다. 모든 박해는 벽파(僻派) 대신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왕들은 흔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벽파의 뜻을 감히 반대하지 못하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 허락하였을 따름입니다.
1838년에 대왕대비(순원왕후)가 바로 그러하였고 그 다음 몇 해 동안의 마지막 박해 때도 그러하였습니다. 대왕대비는 대신들의 뜻을 감히 반대하지 못하였고 마음속으로는 반대하면서도 대신들이 신자들을 가혹하게 박해하고 신부님들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김 대비의 동생 김두근이 살아 있었더라면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조선 안에 외국인 신부님들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신자들을 박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비신자이고 궁중의 2품 고관인 김정의와 순교자 유 아우구스티노(유진길)와 매우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마침내 많은 사람으로부터 그도 천주교에 가담하였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838년경에 중병을 않고 정신을 잃었으며 1839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벽파는 기회를 잡게 되었고 박해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 김대건 부제의 열두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4월 7일
발신지 : 서울
수신인 : 리부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리부아 신부님께,
조선 왕국의 대신들과 관장들 사이에는 어떤 계통, 즉 파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다만 공연한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 하나는 벽파(僻派)라 하고 하나는 시파(時派)라 하는데 서로 반대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이 두 파가 서로 대립하는 근본 이유는 각각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이 당파 싸움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으나 지금은 가법게 볼 수없는 문제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 파 사이에는 시기와 비난, 논쟁과 학살 등이 연출되어 서로 도발하고 고발하여 내몰고 귀양 보내기에 급급합니다.
그들 당파는 다시 노론(老論), 즉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의 구별이 있어 각각 다른 당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노론은 벽파와 손잡고, 남인은 시파와 손잡고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 그렇지 아니한 예도 있기는 있습니다. 천주교는 시파한테서는 용인되고 있으나 벽파한테서는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벽파는 천주교를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김 대왕대비, 즉 현재 임금님의 조모는 시파에 속하고 젊은 대비, 즉 현재의 임금님의 모친은 벽파에 속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신들은 벽파입니다. 그리하여 벽파가'시파를 반대하여 궐기하려고 원하는 때는 그들의 모든 의견을 배척하는 동시에 무엇보다도 무죄한 천주교 신자들을 근절할 행동을 취하므로 여러 번 박해가 일어나 많은 순교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지금 천주교의 제일 큰 적은 조만영(趙萬永)인데 그는 젊은 대비의 부친입니다. 그가 오늘날 이 나라 정치의 최고 권력을 잡고 있으며, 그의 동생 조인영(趙寅永)은 영의정이고 그의 아들(조병규)은 병조판서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박해는 대부분 조만영과 조인영의 계획으로 벌어졌는데, 신자들을 가혹하게 박해하고 신부님들을 죽이라고 명한 것도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신부님들을 죽이고 나서는 프랑스인들이 군함을 타고 들어와 복수를 할까 봐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나라에서 무고한 피를 너무 많이 흘리게 하였으므로 필연코 전쟁이 일어나 온 나라가 큰 재앙을 입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떠들어대고 있으며, 지금은 전쟁을 기다리기까지 합니다.
조선의 국법대로 하면 외국인들은 죽일 수가 없고 오히려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국인 · 달단인 · 일본인들은 필요한 것을 주어 반드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들을 죽인 것은 확실히 종교 때문에 죽인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신부님들이 조선에 온 것은 교황님과 프랑스 왕이 파견해서 온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들을 죽인 후에 무서워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포졸이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 조정은 신부님들을 죽임으로써 프랑스 왕을 모욕하는 불경죄를 범한 것인데, 그들은 일찍이 영국인으로부터 서양의 왕들은 자기 백성이 피살된 경우에는 전쟁을 일으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생각으로 번민하던 우리나라 대신들은 여러 척의 함선이 지나간다는 보고를 받고 프랑스인들이 보복하러 온 것으로 알고불안에 떨었으며, 또한 백성들도 서양 함선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영국 함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프랑스 측에서 이미 여러 해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프랑스라는 나라는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 무서워할 바가못 되는 나라라는 근거 없는 그릇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모든 공포를 떨치고 또다시 신부님들을 죽일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만일 대신들을 저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둔다면 신부님들이나 우리 신자들이나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실상 왕은 이런 일에 대하여 대체로 무죄합니다. 하느님께서 섭리하여 주소서!
만일 프랑스 군함이 조선에 와서도 신부님들을 살해한 사건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신자들의 처지가 더욱 참담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정부에서 우리가 귀국하는 대로 사형에 처할 작정으로 세밀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그들 가까이 있어도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경계도 충분하지는 못한 듯합니다. 그러니까 만일 대신들이 제가 조선에 돌아온 줄 알게 되면 즉시 사방으로 수색할 것입니다.
신부님들이 순교한 다음에도 신자들은 2년 동안 박해를 더 받았습니다. 4년 전부터는 안온한 상태에 있는데 신자들의 기운을 회복시키고 외교인들을 입교시키며 모두를 완성시켜 줄 선교사 신부님들을 하루빨리 조선에 모시기를 모두가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신자의 수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으며 신부님들이 순교한 후 오늘까지 줄어들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증가하여 최소한 만 명은 될 듯합니다. 외교인들은 우리 종교의 진리를 깨닫고 하느님께로 귀화하는 사람이 매우 많으며 그 중에는 몇 마디 권고만 듣고 즉시 입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전부터 우리 종교의 진리를 들어보고자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니 지금 누가 용감히 나서서 그들에게 전교만 하면 종교를 수용할 사람이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신자 10명은 아직 감옥에 갇혀 있고, 5명은 귀양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왕의 조모 김 대왕대비는 아직 생존해 있으나 여러 가지 고통으로 번민하여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으려고 불교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대왕대비가 사망하면 우리 신자들에게 큰 환난이 닥쳐을 것입니다. 왕은 건강하지만 왕위에서 쫓겨날 위험이 있답니다. 대신들은 어느 날 밤 회의를 열어 왕을 옥좌에서 몰아내고 그 대신에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고 모의를 하였다 합니다.
왕은 19세 된 젊은이지만 상당히 신중하고 얼굴에는 병으로 인한 흔적이 뚜렷하나 코가 높고 인물은 그다지 못생기지 않았다 합니다. 먼젓번 왕비가 사망한 후 15세 된 홍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합니다.
우리 교회를 박해하는 대신 조만영과 조인영은 아직 살아 있어서 대단한 권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비신자인 2품 대신 김정희(金正喜) 판서는 아직 귀양에서 풀려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 백성들은 평화를 누리고 배불리 먹고 지내면서 전쟁 소문을 퍼뜨리기를 일삼고 있습니다.
배반자 김여상은 아직 귀양살이를 하면서 첩과 함께 살아 있다고 하는데 그 역시 많은 혹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포졸들과 관장들은 그를 미워하여 있는 힘을 다해서 그를 매질하면서 "이놈아, 너는 유다보다 더 악한 놈이다. 유다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러 오신 예수님을 배반하였다 하거니와 이놈아, 너는 살려고 조선에 온 신부님들을 배반하여 죽였으니 너는 인간도 아니다. "라고 엄히 꾸짖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눈병이 낫지 않았고 그 동안 중병에 걸려 몹시 않았으나, 요새는 힘없는 머리를 겨우 쳐들고 있을 정도로 원기가 조금 회복되고 있습니다. 제가 할 일은 태산같이 많으나 몸은 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 마음은 설치지만 활동은 미미합니다.
현재를 위해서나 장래를 위해서나 이곳 형편을 위해서나 북방의 길을 열어놓을 일이나 강남으로 출발할 일을 생각하면 제가 준비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많지만 병으로 허약해진 몸이 일을 행하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병중에 무능해진 저는 다만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저는 지금 14세 된 학생 두 명을 가르치고 있으며, 또 다른 아이 두 명을 지명하여 두었으나 아직 저에게로 오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제가 병중에 있으나 가능한 대로 강남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출발할 예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들은 금년에 메스트르 신부님과 토마스(최양업 부제)를 영접하기 위하여 북방으로 출발할 것입니다.
중국 함선이나 서양 함선 편으로 무슨 물건이든 조선에 보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임을 신부님께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지금 조정에서는 도처에 군졸을 배치하여 경비하고 있습니다. 외국 함선이 오는 때 혹시라도 그들과 연락을 취하는 조선 사람이 있을까 하여 감시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 조선 종이 20장이 들어 있는 봉투, 조선 그림 석 장이 들어 있는 작은 봉투, 병풍이라고 하는 여덟 폭으로 된 그림, 밤에 사용하는 놋그릇(요강), 신부님들의 유해가 들어 있는 누런 주머니 세 개, 조선 지도, 빗 제 개와 빗을 소제하는 기구, 붓을 쓸 때 붓끝만 풀어서 쓰는 붓 네 자루, 돗자리 하나를 보내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가장 순명하고 무익한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 김대건 부제의 열세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6월 4일
발신지 : 상해
수신인 : 리부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리부아 신부님께
공경하올 신부님,
저는 작년에 조선 대목구의 감목이신 공경하올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주교님의 선교지인 조선에 파견되었습니다. 지금은 조선 안의 준비를 끝내고 11명의 신자와 함께 배로 상해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님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대단히 분주하여 많은 것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에 신부님께 조리있게 편지를 써서 올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조선인 학생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 김대건 부제의 열네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6월 4일
발신지 : 상해
수신인 : 페레올 주교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
지극히 존엄하신 주교님을 변문에서 하직한 후 저는 저넉 무렵이 되어서야 의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마중나온 연락원들을 먼저 보내고 저는 혼자 밤중에 강을 건너 관문을 통과하였는데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닷새를 소비하여 평양이라는 도시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서울까지 무사히 여정을 마치고 신자들로부터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피곤한 일이 겹쳐 여러 차례 병을 앓았습니다.
지금 저는 11명의 신자와 함께 배를 타고 상해에 와 있으며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일로몹시 분주하여 많은 것을 보고 드리지 못합니다.
지극히 존엄하신 주교님께, 조선인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열다섯 번째 편지는 김대건 부제가 6월 4일에 상해에 도착한 후 예수회의 고틀랑 신부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 편지는 유실되었고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만 고틀랑 신부의 1845년 7월 8일자 서한에 나타나고 있다.)
● 김대건 부제의 열다섯 번째 편지 (유실)
발신일 : 1845년 6월
발신지 : 상해
수신인 : 예수회의 고틀랑 신부
● 김대건 부제의 열여섯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7월 23일
발신지 : 상해
수신인 : 리부아 신부
리부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을 신부님,
저는 모든 준비를 끝낸 후 11명의 신자와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이들 가운데 4명만 사공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바다를 구경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모든 것을 비밀리에 급히 추진하다 보니 유능한 사공을 구할 수도 없었고 그 밖의 요긴한 물건들도 장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음력 3월 24일에 돛을 펴고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신자들은 바다를 보고 대우 놀라면서 수군거렸으나 감히 저에게는 묻지 못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제가 하는 일에 대하여 질문하지 말라고 미리 금지해 두었던 때문입니다.
처음 하루 동안은 순풍을 만나 무사히 항해했으나 그후 갑자기 비를 동반한 폭풍우가 3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 폭풍우로 말미암아 강남과 상해에서는 30척 이상의 배가 유실되었다 합니다.
우리가 탄 배는 바다에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작은 배였는데 폭풍우가 점점 심해지자 파도 때문에 몹시 까불리고 무섭게 내팽개쳐져서 거의 침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 뒤편에 끌고 오던 종선 줄을 끊어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위험이 여전히 계속되므로 두 개의 돛대를 베어버리고 마침내 식량까지 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배가 조금 가벼워지기는 했지만 폭풍이 부는 대로 산더미 같은 파도에 휩쓸려 요동을 쳤습니다.
신자들은 3일 동안 먹지 못하여 극도로 탈진하였고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보고 절망하여 "이제는 다 끝났다. 도저히 살아날 수가 없겠다." 하고 서글피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 다음으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성모님의 기적 상본을 내보이면서 "겁내지 말라.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모님이 여기 계시다."는 말로 가능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저 역시 신병중이라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으면서 일을 보았고 마음속의 두려움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으뜸 사공으로 채용한 사람은 벌써부터 영세 준비를 하고 있던 외인이었기에 저는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거센 물결에 키가 부러져 떠내려갔고 배는 폭풍과 파도에 까불리며 대양으로 떠밀려 갔습니다. 그래서 물결을 막으려고 돛들을 묶어가지고 배 뒤에 달아매어 물에 띄었는데 그것마저 그만 줄이 끊어지면서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배 밑에 깔았던 나무토막을 멍석에 싸 묶어 띄웠으나 그것 역시 파도에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구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우리의 희망을 오직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의탁하고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비도 그치고 풍파도 약해져 있었습니다. 하루가 지나자 우리는 기운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모든 이에게 음식을 먹고 주님 안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라고 명했습니다.
이렇게 원기를 회복한 후 우리는 항해를 계속할 준비를 하려 하였으나 돛대도 없고 돛도 없고 키도 없고 종선도 없어 참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영화로우신 우리 동정 성모님께 깊이 의탁하고, 배에 남아 있던 나무를 있는 대로 다 거둬 돛대와 키를 만들었습니다. 대략 닷새 동안 역풍을 거슬러 항해하였더니 우리는 강남성 해안에 도착하였고 멀리 산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돛대도 변변치 않고 항해하는 데 필요한 물건도 부족하여 상해까지 갈 수가 없어서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구원을 청하거나 적어도 길이라도 물어보고 싶었으나 종선이 없어 그들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우리한테 오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보고 피해 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인간의 구원을 바랄 수가 없게 되어 오로지 하느님의 도우심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 산동 배 한 척이 나타났는데 우리를 보고서는 두려워하여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저는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그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다가오려 하지 않았으나 이윽고 측은한 마음이 생겼는지 우리한테로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배에 올라가 선장과 인사하고 나서 우리를 상해까지 인도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의 설명도 간청도 들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와 함께 산동으로 가서 관례에 따라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되돌아가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북경을 거쳐 귀국하고 싶지는 않고 배를 고치기 위해 반드시 상해로 가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돈 천 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듣고서야 겨우 저의 청을 승낙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배를 그 배에 달아매고 대략 8일 동안 줄곧 역풍을 거슬러가다가 또 폭풍우를 만났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끌고 가던 선장의 배는 파선하여 한 사람만 살고 그 외에는 모두 죽었습니다.
그 폭풍우가 지나고 다시 항해를 하는데 이번에는 해적들이 우리에게 달려들며 선장을 향하여 "조선 사람들의 배를 끌고 가지 말라. 우리가 그들을 약탈하련다."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선장에게 그들을 폭파시키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러자 해적들은 우리를 떠나 달아나 버렸습니다.
약 7일 후에 오송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중국 관장이 경찰관들을 우리에게 보내어 어디서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왔느냐고 심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조선 사람들인데 큰 폭풍우를 만나 여기까지 표류하여 왔고 상해로 가서 배를 수리할 작정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침 영국 함선의 함장들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우리는 조선 사람들이며 선교사 신부님을 찾아왔노라고 설명하고는 우리를 중국인들로부터 보호해 주고 또 영사관으로 안내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친절했고 저의 청을 기꺼이 승낙할 뿐 아니라 포도주와 고기도 내어주고 또 저를 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오송구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그곳 관장을 방문하였습니다. 관장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나서 우리 사정을 황제께 보고하여 육지로 조선에 되돌려 보내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두 나라 사이의 관례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육지로 해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여기에 온 사실을 황제께서 아시게 되는 것도 원치 않으니 보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우리 사정을 황제께 보고하든지 말든지 우리에게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배를 수리한 다음에 조선으로 되돌아갈 터이니 아무 염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우리가 다만 귀국 해안에 상륙해서 이 지방 땅을 발고 이 지방 물을 마시는 것뿐임을 알고 계시면 넉넉하겠습니다. 나는 오직 완전한 자유를 가지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상해의 관장에게 조선 배한 척이 수리하러 그곳으로 간다고 통지하여 주십시오. 우리 배 때문에 상해의 관장이 조금이라도 귀찮거나 걱정되는 일을 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슨 곤란하거나 불안한 일을 당하지 않고 상해에 머물러 있게 허락하여 주도록 그 관리에게 편지를 써주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중국 관장은 제가 영국인과 교제하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은 조선 사람인데 어떻게 영국인들과 절친한 친구처럼 지내고 영국말까지 알아듣는가." 하고 말하면서 대단히 놀라워하였습니다.
오송구에서 출범하여 상해 항구로 들어갔습니다. 두 명의 영국인들이 와서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배를 중국인 안내자에게 맡기고 영국인들의 종선을 타고 상해 시가지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영국인들에게 저를 영사에게로 인도해 줄 안내자를 구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아서 존 엠슨이라는 영국인이 프랑스어를 할 줄 알므로 저를 위하여 영사에게 편지를 써주었습니다.
저는 영사관에 들어가 매우 환대를 받고 우리가 필요한 모든 사정을 영사에게 설명하는 동시에 우리를 중국인들의 손에서 보호하여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페레올 주교님이 우리가 갈 거라고 영사에게 미리 말씀해 두셨고, 보호해 주도록 부탁해 두셨기 때문에 영사는 벌써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중국인 신자 집으로 가서 이틀 동안 유숙하고 있는데 강남 전교지의 전교사인 고틀랑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그 신부님에게서 5백10원을 받았는데 그 중에 4백 원은 우리를 인도해 준 중국인 인도자에게 주고 약 30원은 신자들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는 동안 상해의 중국 관장이 경찰관을 우리 배에 보내 여러 가지 질문을 한 후 파수꾼을 두어 밤에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시장도 몸소 경찰관을 거느리고 와서 배를 보고 돌아가더니 쌀 20말과 고기 20근을 보내왔습니다.
제가 배로 돌아오니 신자들이 당황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국 관장이 여러 가지로 심문하고 또 수천 명이나 되는 중국인들이 구경하러 몰려왔던 까닭입니다. 중국 관장은 제가 배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다시 경찰관을 보내어 무슨 이유로 여기 왔으며 각 사람의 성명, 연령, 거주지 등을 조사하였습니다. 우리는 간단하게 대답을 한 후 중국 관장에게 더 이상 사람을 보내어 우리를 귀찮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쌀과 고기를 돌려보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귀찮은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한두 번 중국 관장을 면회하였습니다.
상해의 관장은 우리에 대한 모든 사실을 송광부의 상관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관은 자기가 저를 알고 있으며(아마 제가 세실 함장과 함께 있었을 때 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입니다.) 또한 우리가 마음대로 상해에 체류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답서를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한갓 호기심으로 너무나 많이 몰려들었으므로 저는 작대기로 그들을 쫓았습니다. 그리고 제게 너무 무례하게 행동한 경찰관을 엄히 책망하였는데, 그들은 관장한테서도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상해 주민들은 저를 큰 인물로 여기고 있으며 중국 관장은 제가 영국인과 친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정체불명의 이상한 존재라 하여 많은 의혹을 품고 있는 모양입니다.
한 번은 관장이 경찰관을 보내어 우리보고 언제 떠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나는 배를 고치기 위하여 여기에 더 머물러 있어야 하오. 그뿐 아니라 당신들의 상급 관장한테서 들은 말인데 얼마 후에 세실 함장이 여기 온다고 하니 나는 그를 만나보기 위해서도 더 머물러 있어야 하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중국 관장은 우리 때문에 관직을 잃을까 봐 두려워 우리가 출발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모든 사정을 다 설명드릴 필요도 없거니와 또한 그럴 시간도 없어서 이만 줄입니다. 이미 배는 수리하였고 지금은 종선을 만드는 중입니다. 저희 모두는 주님의 은혜로 잘 있습니다. 조선 대목구장 주교님의 도착을 날마다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경하올 베지 주교님은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는데 길에서 병이 나셨다고 합니다. 남경에서는 작은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영국 영사도 안녕하시고 우리 사정을 지극히 잘 주선해 주고 계십니다.
사공들과 조선 선교지를 위해 수고를 많이 한 신자들에게 선사하기위해 상본과 패를 보내주시기를 신부님께 청합니다. 특히 성학자 토마스, 성 가롤로, 우리 주님의 양부이신 성 요셉, 성 요한 사도의 상본과 십자고상 상본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신부님께 드리려고 조선 물건 몇 가지를 가지고 왔으나 지금은 보내드릴 적당한 방법이 없어 주교님이 오실 때 보내드릴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선교지로 보내실 물건들은 모두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는 여러 신부님들께 편지하실 때 저의 인사도 전해주시 기를 바랍니다.
벌써 신부님께 편지를 올렸어야 마땅한데 여러 가지로 분주하게 지내느라 못 올렸습니다. 더구나 고틀랑 신부님이 여기 있는 보고서를 한 번씩 읽어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상서가 늦었습니다.(김대건 부제가 가지고 온 보고서는 그가 서울에서 1845년 3월과 4월에 쓴 조선 초기 교회사와 1839년 박해 때 순교자들의 행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다음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에 가서 팔 수 있는 물건들은 여러 가지 색깔, 특히 흰색 서양포목과 여러 가지 색깔의 명주, 여러 가지 색, 특히 붉은색과 푸른색의 중국 포목과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이곳 신자들이 모두 신부님께 인사드립니다.
공경하올 스승님께, 부당하고 무익한 아들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추신 : 1845년 7월 23일 저는 페레올 주교님께 짧은 편지를 올렸습니다. 만일 주교님이 거기(마카오)에 안 계시고 출발하셨다면 신부님께서 그 편지를 읽으시고 원하시는 대로 처리해 주십시오.
● 김대건 부제의 열일곱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7월 23일
발신지 : 상해
수신인 : 페레올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
지극히 존엄하신 주교님께 벌써 편지를 올렸어야 했습니다마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분주하여 편지를 올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주교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는 영국 영사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기쁨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공경하올 주교님의 분부를 받고 조선에 파견된 후 저는 하느님의 은혜로 무사히 입국하여 서울에서 신자들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 저는 병에 걸려 여러 차례 심하게 앓았습니다. 신자들은 지금 박해를 받지 않고 편안히 지내고 있습니다마는 목자가 없어 탄식하고 있습니다. 신자수가 나날이 증가되고 열심도 커지며 배교한 사람들도 다시 회개하여 바른길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외교인들도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오류를 버리고 참 하느님께로 회두하는 사람이 많으며, 외교인 사이에 천주교를 가장 좋게 여기는 여론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신자수는 최소한 만 명으로 추산되고 순교자 수는 처음부터 8백 명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오늘날 실제로 적극적 박해를 당하고 있지는 않으나 날마다 즉을 위험에 처하여 있으며 참으로 가난하고 참혹한 환난 가운데 있습니다.
주교님의 거처하실 집을 한 채 사서 어느 신자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강남으로 오기 위하여 범선 두 척을 샀는데 한 척은 좀 큰 것이고 또 한 척은 작은 것이었습니다. 작은 배는 폭풍우로 바다에서 잃었습니다.
조선을 떠나 강남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한 달이 걸렀고 두 번이나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제가 조선에서 출발할 때 데리고 온 신자들의 부모나 아내들은 그들의 행방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강남 근처 바다에서 해적을 만났으나 동정 성모 마리아의 보호를 받아 감히 우리를 약탈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오송구와 상해에 도착하였을 때 영국 영사와 영국인들이 우리를 매우 친절하게 후대하고 진심으로 보호해 주었습니다.
중국 관장은 우리에게 육지로 해서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관례에 따라 우리가 도착한 사정을 황제에게 보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반대하여 그리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지금은 그 중국 관장도 저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곳에 마음대로 체류하도록 허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가 영국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합니다. 또제가 중국말을 잘하는 것을 보고 저를 중국인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국 영사는 자기가 주교님이 보내신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저더러 주교님께 보고 드리라고 하면서 편지를 저에게 건네주었습니다.(그가 통역 없이 저에게 이 말을 하였으므로 자는 그 말을 잘 알아듣지는 못하였습니다.)
모든 사정을 명확하고 자세하게 주교님께 상서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나 지금 제 주변에 할 일이 너무나 많이 널려 있고 또 머지않아 주교님을 만나 뵙겠으므로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리부아 신부님께 올린 편지에는 좀더 자세히 적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주교님이 오시기만을 날마다 고대하고 있습니다.
범선에는 물건을 둘 만한 자리가 넉넉하니 주교님께서 오실 때 가져올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가져오시기를 바랍니다. 조선에서 팔 만한물건은 서양 포목, 천, 비단과 같은 것들입니다. 조선의 은화는 그 모양이 조금 가늘고 기다랗습니다. 은덩이는 모양이나 크기에 상관없이 통용됩니다.
조선의 대신들은 프랑스 왕에 의하여 조선에 파견되었다고 여기는 프랑스 신부님들을 살해한 후에 혹시 프랑스인들이 보복하러 오지나 않을까 하여 몇 해 동안 무서워했습니다. 프랑스 왕이 파견한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프랑스 왕을 모욕하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도 프랑스인들이 보복하러 오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은 다시 대담해져서 또다시 신자들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베지 주교님은 길에서 병환이 나셔서 아직 돌아오시지 못했습니다. 고틀랑 신부님으로부터 5백80원을 받았습니다.
공경하올 주교님께 이곳 신자들이 인사를 드립니다.
존엄하신 주교님께, 순명하고 무익한 아들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 김대건 신부의 열여덟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11월 20일
발신지 : 서울
수신인 : 리부아 신부
리부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우리는 9월경에 강남을 출발하였습니다. 바다에서 여러 차례 폭풍우로 시달렸고 바람은 더욱 거세어져 키가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배가 파손되지 않도록 돛대를 베어버리고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거센 역풍으로 우리는 제주도까지 떠내려갔습니다. 그후 여러 날 걸려 강경이라는 항구에 도착하였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무런 재앙 없이 신자들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과 공경하올 다블뤼 신부님은 주님 안에 평안하시고 조선말을 공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메스트르 신부님과 토마스 부제를 영입할 여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박해한 왕과 대신들은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신자들은 현재로서는 평화롭게 지내고 있으나 또 다른 박해가 일어난다는 소문이 신자들을 동요시키고 있습니다.
금년 음력 7월경에 영국 함선 한 척이 제주도에 왔습니다. 그때 대신들과 백성들은 살해된 신부님들의 피를 보복하려고 왔다고 생각하며 떨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조선에 서양 함선이 자주 드나드는 것은 신자들에 대한 외교인의 증오심을 자극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서양 사람들이 접근해 오는 것은 신자들이 그들을 초청하고 그들과 내통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떤 외교인은 우리가 강남에 갔다 온 것을 의심하고 탐사하면서 나쁘게 말하고 있습니다.
표현력이 부족한 저는 감히 많은 것을 적어드리지 못합니다.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과 공경하올 다블뤼 신부님께서 스승님께 편지할 것입니다. 또한 저는 계획과 원의로 밖에는 한 일이 거의 아무것도 없으므로 보고드릴 것이 많지도 않습니다.
또한 지극히 좋으신 공경하올 리부아 신부님과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진심으로 모든 행복과 성공을 기원합니다.
공경하올 신부님, 기도와 미사성제 가운데 저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경하올 스승님께, 부당하고 무익한 종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 김대건 신부의 열아홉 번째 편지
발신일 : 1846년 음력 6월 8일 (양력 7 월 30 일)
발신지 : 옥중
수신인 : 베르뇌, 메스트르, 리부아,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베르뇌 신부님, 메스트르 신부님, 리부아 신부님,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여러 신부님께 한 장의 편지를 드리게 되니 공경심이 모자라는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처해 있는 곳과 환경뿐 아니라 공경하을 신부님들께 대한 저의 정성과 애정이 이렇게라도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음력 3월경에 지극히 고귀하시고 공경하을 고 페레올 주교님이 분부하신 대로 저는 배를 타고 백령도에 갔습니다. 거기에 와 있는 중국 어선들을 통하여 여러 신부님께 보내는 라틴어 편지와 한문 편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후 그 편지는 모두 조선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압수되었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는 4명의 신자와 함께 체포되어 다 같이 결박당하여 수도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서울로 오는 도중에 여러 읍내에서 밤을 지낼 때마다 우리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저는 마치 외국인처럼 체포되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보니 신자들이 잡혀왔습니다. 머지않아 현 가롤로도 교회를 위하여 활동하던 5명의 여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또한 저의 집에 있던 돈과 제의 등의 물건도 압수되었습니다. 지금은 포졸들이 신자들을 잡으려고 사방에 파견되어 있다는데 누구보다도 공경하올 주교님의 복사인 이 토마스를 체포하려 한답니다. 주교님과 신부님도 체포될까 염려됩니다.
저는 편지 때문에 무수히 많은 심문을 당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이번에도 큰 박해가 일어날 듯합니다.
저는 함께 갇혀 있는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로 용기를 북돋아 주고 예비신자 두 사람에게는 세례성사를 주었습니다. 제가 있는 감옥에는 10명이 함께 갇혀 있고 다른 감옥에 갇혀 있는 신자는 7,8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재판관에게 프랑스의 강대함과 관대한 관습에 대하며 여러 번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제 말을 믿는 것처럼 보였으나 프랑스 신부님들을 죽인 후에도 프랑스로부터 아무런 보복을 받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프랑스인 때문에 저를 죽이기를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위에 언급한 이유로 더 이상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안배가 없는 한 조선 신자들이 선교사 신부님들을 영입하거나 보호할 대책과 방법이 없습니다.
프랑스 영사가 중국 황제에게 신부님들을 죽인 것은 잘못한 것임을 설득시키고 또 중국 황제가 조선 왕에게 프랑스인들을 그렇게 함부로 죽이지 말도록 그리고 신자들에게 자유를 주도록 명령하게끔 편지를 보낸다면 대단히 좋을 것입니다. 만일 중국 황제가 조선 왕에게 그렇게 명령한다면 조선 왕은 이에 순종할 것입니다.
비록 후에 조선 신자들이 선교사들을 영입하러 가지 못하게 될지라도 신부님들이 영국 함선을 타고 조선에 오시도록 주선하시기 바랍니다.
이만 붓을 놓으며 공경하올 여러 신부님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립니다.
지극히 고귀하신 베르뇌 신부님, 안녕히 계십시오.
지극히 공경하올 메스트르신부님, 안녕히 계십시오.
지극히 공경하올 리부아 신부님, 안녕히 계십시오.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 안녕히 계십시오.
머지않아 천당에서 영원하신 성부 대전에서 서로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저를 대신하여 모든 공경하올 신부님들께도 인사드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토마스여, 잘 있게. 이후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그리고 내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기를 그대에게 부탁하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한 저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로 하여금 모든 혹독한 형벌을 끝까지 용감하게 이겨내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여, 누가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들, 안녕히 계십시오.
무익하고 부당한 종,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조선 선교지의 교황 파견 선교사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산동 어선들은 음력 3월에 백령도로 왔다가 음력 5월에 돌아갑니다.
● 김대건 신부의 스무 번째 편지
발신일 : 1846년 8월 26일
발신지 : 옥중
수신인 : 페레올 주교
(이 편지는 아주 얇은 한지에 붓으로 양면에 빈자리 없이 빽빽하게 라틴어로 쓴 것이다. 그 라틴어 원본은 유실되고,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만 보존되어 있다. 달레 신부는 자신이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에 이 편지를 수록하였다.)
공경하올 주교님께 ,
우리가 주교님을 떠나온 다음에 서울에서 일어난 일은 주교님께서 이미 자세히 아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여행 준비를 마친 후 닻을 올리고 순풍을 만나 무사히 연평 앞바다에 도착하여 보니 바다는 어선들로 덮여 있었습니다.
저의 일행은 생선을 사가지고 순위도 항구로 가서 되팔려고 하였으나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선을 육지에 풀어놓고 사공 한사람을 시켜 소금으로 절이게 하였습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항해를 계속하여 소강, 마합, 터진목, 소청, 대청 등 여러 섬을 지나 백령도 근처에 와서 맞을 내렸습니다. 거기에는 백 척 가량의 중국 산동 어선이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배들은 해안 가까이까지 와 있었습니다마는 그 배에 탄 어부들은 아무도 조선 땅에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 해안의 높은 곳과 산꼭대기에서 포졸들이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근처 섬에 사는 조선 사람들이 호기심에 끌려 중국 배를 구경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저도 밤중에 중국 배를 찾아가서 그 배의 주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주교님의 편지와 또한 제가 베르뇌, 메스트르, 리부아 신부님들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중국 신자두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들 편지에 황해도 해안의 섬과 바위와 그 밖에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조선 지도 두 장을 동봉하였습니다.
이곳은 중국인들의 중개를 조심스럽게 잘 이용하기만 하면 선교사신부님들을 영접하고 서로 편지를 전달하기에 매우 유리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 어선들은 고기를 잡으러 해마다 음력 3월 초순에 이곳으로 모이고 5월 하순에는 돌아간답니다.
우리는 주교님의 지시대로 실행한 후 그곳을 떠나 순위도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여행은 그때까지는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기에 끝까지 성공하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우리가 해변에 펼쳐놓았던 생선이 아직도 마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곳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졌습니다.
저의 복사 베난시오가 박해를 피하여 7년 동안 어떤 사람의 집에 숨어 있었을 때 그 집에 맡겨두었던 돈을 찾으러 가겠다며 뭍에 내리게 해 달라고 하기에 허락하였습니다.
그가 떠난 다음에 관장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배에 와서 중국 배를 쫓으려 하니 우리 배를 빌려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조선 법에 따르면 양반의 배는 공공부역에 동원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백성들은 저를 지체 높은 가문의 양반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베난시오가 이런 경우 취할 태도를 일러준 바가 있어 저는 관장에게 우리 배를 빌려주게 되면 제 체면이 깎일 것이고 따라서 이 지역에서 일을 보는 데 지장이 있기 때문에 빌려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포졸들은 제게 욕을 퍼붓고는 키를 맡은 으뜸 사공을 잡아가더니 저녁때 다시 와서 두 번째 사공을 관가로 끌고 갔습니다. 관장은 그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은 결과 저의 신분에 대하여 중대한 의혹을 일으키는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관장은 사공 한 사람이 신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포졸들은 "우리는 30명이다. 만일 저 사람이 참으로 양반이고 그자가 우리에게 폭력을 쓴다고 해도 30명이 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한두 명만 죽을 테니 함께 그자를 잡으러 가자."고 의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밤중에 여러 명의 기생을 데리고 와서 미친 듯이 저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들은 제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 뽑고 포승으로 결박하여 발길질과 주먹질과 몽둥이질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남아 있던 사공들은 어두운 밤을 타서 종선으로 빠져나가 힘첫 노를 저어 달아났습니다. 해변에 이르자 포졸들이 제 옷을 벗기고 마구 때리며 온갖 능욕을 퍼부으면서 관가로 끌고 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관장이 저에게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어찌하여 임금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주교를 믿는 거요? 그 교를 버리시오."라고심문하기에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믿는 거요. 우리 종교는 하느님을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 주오. 나는 배교하기를 거부하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관장은 저를 고문하게 하면서 "배교하지 않으면 곤장으로 때려죽이겠소."라고 말하였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는 결코 우리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우리 종교의 진리를 듣고 싶으면 들어보시오. 내가 공경하는 하느님은 하늘과 땅과 사람과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고, 선인들은 상 주시고 악인들은 별하시는 분이오. 그러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느님을 공경하여야 마땅하오. 관장 나으리,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니 감사하오. 그리고 우리 하느님께서 당신을 더 높은 벼슬에 오르게 하여 이 은혜를 갚아주시기를 바라오."라고 말했습니다.
관장과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는 껄껄 웃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길이가 여덟 자나 되는 긴 칼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즉시 제 손으로 그 칼을 목에 쓰니 둘러섰던 사람들이 또 한번 껄껄 웃어댔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미 배교한 두 사공과 함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저는 손·발·목·허리를 꽁꽁 결박당하여 걸을 수도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저는 호기심에 끌린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여 매우 괴로웠습니다. 저는 밤이 이슥토록 저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더니 그들은 관심 있게 듣고 나서 임금님이 금하지만 않으면 자기들도 믿겠다고 말하였습니다.
포졸들이 제 보따리에서 중국 물건이 나오자 저를 중국인인 줄로 믿었습니다. 이튿날 관장은 저를 출두시킨 뒤 중국인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아니오. 나는 조선 사람이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의 말을 믿지 않고 "중국 어느 지방 출신이오?“ 라고 묻기에 "나는 중국 광동성의 마카오에서 공부하였소. 나는 천주교 신자요. 구경도 하고 천주교를 전하기도 할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를 다시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닷새가 지난 후에 한 포교가 포졸들을 거느리고 저를 황해도의 수부인 해주 감영으로 이송하였습니다. 감사가 저에게 중국인이냐고 묻기에 순위도 관장에게 대답한 것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영혼의 불사불별, 천당과 지옥, 하느님의 존재, 죽은 후의 행복을 위하여 하느님을 공경할 필요성 등을 그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감사와 그 부하들은 "당신이 한 말이 다 좋고 이치에 맞는 말이기는 하지마는 임금님께서 천주교인이 되는 것을 금하시지 않소." 하고 대꾸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시 신자들과 선교지에 해를 끼칠 여러 가지 정보를 묻기에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화가 나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혹독한 고문을 할 것이오."라고 큰소리로 호령하였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대답하면서 저는 여러 가지형구가 있는 데로 달려가 그것을 감사의 발치에 던지며 "나는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 치실 테면 치시오. 나는 당신들의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포졸들은 이내 그 형구를 집어치웠습니다. 감사의 부하들이 저에게 다가와서 "감사 앞에서는 누구라도 소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관례요."라며 일러주기에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장성한 어른이고 양반이오. 나는 그런 말은 모르오."라고 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난 다음 감사가 다시 저를 출두시킨 뒤 중국의 여러 사정을 진력나도록 캐물었습니다. 때때로 제가 정말 중국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고 통역을 통해 묻기도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가 저에게 배교하라고 명하기에 저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소롭다는 표시로 빙긋이 웃었습니다.
저와 함께 잡힌 신자 두 사람이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제가 살고 있는 서울 집 주소와 주교님의 복사 이 토마스와 그 동생 마테오 그리고 그 외 다른 몇몇 신자의 이름을 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제가중국 배와 연락한 것과 배 주인에게 맡긴 편지 등에 대해서도 실토하였습니다. 그 즉시 포졸 한 부대가 중국 배에 파견되어 그 편지들을 빼앗아 감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 후에는 저와 사공을 각각 다른 감옥에 가두어 놓고 네 명의 포졸들이 밤낮으로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였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에 쇠사슬이 채워지고 목에는 칼이 씌워졌습니다. 우리 세 사람의 허리는 긴 줄로 묶여져 있었기 때문에 생리적 요구를 해결해야 할 때마다 그 줄을 붙잡고 있어야 하였습니다. 우리가 당한 고통이 어떠하였겠는 지는 상상에 맡겨드립니다.
제가 마카오에서 병을 않았을 때 치료하기 위하여 거머리를 가승에 붙여서 생긴 흠집이 일곱 군데나 있는 것을 보고 포졸들은 저를 북두칠성이라는 둥 별별 조롱을 다하며 야유 하였습니다.
임금님은 우리가 체포된 사실과 또 제가 중국인이라는 말을 듣고 포졸을 보내어 서울로 압송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길을 가는 동안에도 감옥 안에 갇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결박되어 있었습니다. 도둑이나 큰 죄인처럼 붉은 포승으로 팔을 묶고 머리엔 검은 자루를 씌웠습니다.
구경꾼들이 우리를 귀찮게 괴롭혀서 길을 걷기가 몹시 피곤하였습니다. 제가 외국인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나가는 우리를 구경하려고 나무 위나 지붕 위로 올라가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서울에 도착하여 포도청에 수감되었습니다. 포도청 사람들은 저의 말투를 들어보고는 "분명히 조선 사람이다."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이튿날 재판관들이 저를 출두시켜 놓고는 "당신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오? 라고 묻기에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중국에 가서 공부하였소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중국어 통역을 불러다가 저와 이야기를 시켜보았습니다.
1839년 박해 때 배반자(김여상)가 조선 소년 3명이 서양말을 배우러 마카오로 떠났음을 일러바쳤습니다. 또 저와 함께 잡힌 신자 한 사람이 제가 이 나라 사람임을 실토하였으므로, 저의 신분이 오랫동안 감춰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판관들에게 "나는 그 세 소년중의 하나인 김대건 안드레아요."라고 자백하는 동시에 조국에 돌아오기 위해 겪어야 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판관들과 구경꾼들이 "가엾은 젊은이로다. 어려서부터 엄청난 고생을 많이도 하였구나." 하며 혀를 찼습니다. 그런 다음 임금님의 명령에 따라 배교하기를 명령하였습니다. 저는 "임금님위에 하느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을 공경하라고 명하시오. 그러니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은 임금님의 명령이라도 정당화시킬 수 없는 큰 죄악이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신자들을 대라고 독촉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애덕의 의무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천주교에 대하여 묻기에 저는 하느님의 존재와 단일성, 우주만물의 창조, 영혼의 블사 불멸, 천당과 지옥, 창조주를 경배할 필요성, 이교의 허위성 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제가 말을 끝내자 재판관들은 "당신의 종교도 좋소. 우리도 우리 종교가 좋기 때문에 믿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당신들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우리를 편히 지내도록 조용히 내버려 두어야 하지 않소?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당신들은 우리를 박해하고 우리를 극악한 범죄인보다 더 가혹하게 다루고 있소. 당신들은 우리 종교를
옮고 좋은 종교라고 인정하면서도 마치 극악한 종교처럼 박해하고 있소. 이것은 자가당착이고 모순이오."라고 반박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대답 대신 그저 바보스럽게 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압수된 여러 통의 편지와 지도를 저에게 가져왔습니다. 한문으로 씌어 진 편지 두 통은 관장이 직접 읽었으나 거기에는 안부의 말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양 글씨로 쓴 편지를 저에게 내밀며 번역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천주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게 번역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베르뇌, 메스트르, 리부아 신부님에 관해 질문하였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중국에 사는 큰 학자들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주교님의 편지와 저의 편지 글씨가 서로 다른 것을 발견하고 누가 썼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통틀어 제가 썼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주교님의 편지를 내보이면서 써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들이 꾀를 쓰는 모양이기에 저도 꾀를 내어 그들을 이겼습니다. "그 글씨는 철필로 쓴 것이니 내게 철필을 갖다 주시오. 그러면 분부대로 하겠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는 철필이 없소."라고 하길래 저는 "철필이 없으면 그와 같은 글씨를 쓸 수 없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새것을 가져왔습니다. 재판관은 그것을 제게 주며 "이것을 가지고 쓸 수는 없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철필과 같지는 않지만 서양 글씨는 한사람이 여러 모양으로 다르게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릴 수는 있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고 저 새깃을 뾰족하게 깎아 아주 가는 글씨 몇 줄을 써놓고 그 다음에는 새것의 끝을 잘라버리고서 굵은 글씨를 써놓은 뒤에 "자, 보시오. 이 두 글씨가 다르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만족하게 여겼던지 편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주교님이 보시다시피 우리 조선의학자는 서양의 학자와 같은 수준이 아님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와 함께 잡힌 신자들은 서울에서 아직 고문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가롤로(현석문)는 자기와 함께 잡힌 신자들과 다른 감옥에 갇혀있어서 우리와는 연락할 수가 없습니다.
저와 같은 감옥에 함께 갇혀 있는 10명의 신자 중에 4명이 배교하였는데 그들 중 3명은 자신의 나약함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1839년에 나약하였던 이(신규) 마태오가 지금은 넘치는 용맹으로 순교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배의 키를 맡았던 으뜸 사공 선실의 부친과 그리고 전에 신자들에게 좋지 못한 표양을 주었던 남(경문) 베드로도 이 마테오를 본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형장에 끌려갈 날짜는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탁하고 주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 할 용맹을 주시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주교님의 복사 이 토마스와 그 밖의 주요한 신자들을 기어이 체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포졸들도 지쳤는지 신자들을 수색하는 데 열성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들은 이천, 양지, 은이,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각처로 갔다고 합니다.
주교님과 안 다블뤼 신부님은 제가 죽은 후에도 깊숙이 숨어 계시기를 바랍니다. 재판관의 말을 듣자니 외연도 근처에 정박한 세 척의 군함이 프랑스 군함으로 믿어진다고 합니다. 프랑스 황제의 명령을 받고 파견되어 온 그 군함은 조선에 큰 환난을 내릴 듯이 위협하고 나서 두척은 내년에 다시 오겠다고 다짐하고 떠나갔고 한 척은 조선 근해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조선 조정은 1839년에 순교한 3명의 프랑스인을 죽인 사건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무슨 목적으로 군함이 왔는지 아느냐고 묻기에 저는 그들이 왜 왔는지 알 수는 없으나 프랑스인들은 아무 이유 없이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으니까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강력한 나라지만 그 정부는 관대한 도량을 가졌다고 하였더니 제 말을 믿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인을 3명이나 죽였는데도 아직 아무런 보복을 당하지 않았다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만일 프랑스 함선이 실제로 조선에 왔다면 주교님께서는 그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저에게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 한 장을 주면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화려한 여러 가지 색깔로 두 장을 그렸는데 이것이 그들의 눈에 들었습니다.
한 장은 임금님께 바칠 것이랍니다. 지금 저는 대신들의 지시로 간단한 지리 개설서를 편찬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를 큰 학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참으로 딱한 사람들입니다.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떨어져 있던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만 만나보았을 뿐인데 또다시 갑작스럽게 잃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시기를 주교님께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저는 진정으로 주교님의 발아래 엎드려 지극히 사랑하올 아버지이시고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립니다. 또 베지 주교님께도 같은 인사를 드립니다. 다블뤼 신부님께 지극히 공손한 하직 인사를 드립니다. 이 다음에 천당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며 감옥에 갇힌 탁덕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주교님께 올리는 편지의 추신 : 감옥 안에서, 1846년 8월 29일 프랑스 군함이 조선에 왔다는 확실한 소식을 오늘 들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협만 하고 돌아간다면 도리어 우리 교회에 크나큰 재앙만 남게 하고 저도 그로 인하여 죽기 전에 가혹한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주 하느님 , 모든 일을 잘 보살피시어 좋은 결과가 있게 하소서 .
● 김대건 신부의 스물한 번째 편지 (마지막 회유문)
발신일 : 1846년 8월 말
발신지 : 옥중
수신인 : 조선 신자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無始之時)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配設)하시고, 그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慰藉)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效驗)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背主背思)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得罪)하면 아니 남만 못 하리.
밭을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辛苦)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 이르러 곡식이 잘 되고 염글면, 마음의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요, 곡식이 염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염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염근 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로 천국을 누릴 것이요, 만일 염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온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가운데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나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승천 후 종도(宗徒)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 두루 무수 간난(艱難) 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이 성교 들어온 지 5,60년에 여러 번 군난(窘難)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熾盛)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患難)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哀痛之心)이 없으며 육정(肉情)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 돌아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명(主命) 아니면 주상주벌 (主賞主罰) 아니랴.
주의 성의(聖意)를 따라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 편을 들어 이미 항복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遑遑)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友愛)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광영(爲主光榮)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는 20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들의 가족을 부디 잊지 말라.
할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紙筆)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만나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의 이런 난시(難時)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우를 빌어 삼구(三仇)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광영하고 여등(汝等)의 영원 대사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德功)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구령사(事主救靈事)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修治)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 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矜憐)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 하노라.
부감목 김 안드레아.
세상은 온갖 일이 막비주명(莫非主命)이요 막비주상주별(莫非主賞主罰)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爲主)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람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 김 신부 사정 정표
[출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편지들|작성자 프리스트에서 발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