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약 성 서 서간 · 묵시편 |
NIHIL OBSTAT
Tokugen, die 28 Januarii 1941
Dr. P. Lucius Roth, O.S.B
Censor
IMPRIMATUR
Tokugen, die 1 Februarii 1941
Bonifacius Sauer, O.S.B
Episc. Titl. et Abbas Nullius
교황 사절의 친서
경애하올 아르눌프 신부께
신약 성서가 첫번으로 조선어 번역의 완성한 실현화를 보게 됨에 따라, 본인으로서는 이를 무상의 기쁨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이렇듯이 허다한 언어로 성서가 번역된 후, 또 새 언어로 번역되었으니, 이에 있어 이는, 성교회의 성의에 의하여, 또는 성 비오 十세 성하의 개시하신 민활한 운동과의 일치하에 신도들의 사용에 제공되는 것입니다.
성 분도 수도원이 조선의 미소한 일 촌락에-사실에 덕원 수도원과 같이-감추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성 분도 회원들이 로마 성도(羅馬聖都)에서 불가타(Vulgata)의 정정(訂正)을 위하여 무량의 수고를 하는 그 같은 때에 이 번역 사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피선된 것은 전혀 섭리적 배치(攝理的配置)라고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간행(刊行)에 제하여 귀 신부께, 비록 귀하는 귀 자신이 조선인들과 또는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하는 선교사들에게 얼마간이라도 기여(寄與)함이 되는 것외에는 일절 다른 목적이 없었음을 잘 앎에도 불구하고, 본인으로서는 귀 신부께 귀 사업의 양호한 성적을 위하여 만강의 축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이 이유 하에 본인은 천주께 구하여, 당신 위안으로써 귀하를 위안하시되, 특히 귀 성서가 우리 신성한 종교의 선포에 공헌함이 있기를 묵도할 수 있는 그 위안으로써 보상하시기를 빌어 마지 아니하는 바입니다.
一九四一년 三월 四일
동경 주재 로마 교황 사절
바오로 마렐라
보 기
마 복 | 마테오 복음 | 티 전 | 티모테오 전서 |
말 복 | 말구 복음 | 티 후 | 티모테오 후서 |
루 복 | 루까 복음 | 티 토 | 티토서 |
요 복 | 요안 복음 | 필 레 | 필레몬서 |
종 도 | 종도 행전 | 헤 브 | 헤브레아서 |
로 마 | 로마서 | 야곱 | 야고버서 |
코 전 | 코린토 전서 | 베 전 | 베드루 전서 |
코 후 | 코린토 후서 | 베 후 | 베드루 후서 |
갈 라 | 갈라타서 | 요 一 | 요안 제一서 |
에 페 | 에페소서 | 요 二 | 요안 제二서 |
필 립 | 필립피서 | 요 三 | 요안 제三서 |
콜 로 | 콜로새서 | 유 다 | 유다서 |
텟 전 | 텟살로니카 전서 | 묵 시 | 묵시록 |
텟 후 | 텟살로니카 후서 |
신약 성서 서간·묵시록편 목차
성바오로 종도의 서간
로마서
코린토 전서
코린토 후서
갈라타서
에페소서
필립피서
콜로새서
텟살로니카 전서
텟살로니카 후서
티모테오 전서
티모테오 후서
티토서
필레몬서
헤브레아서
야고버서
베드루 전서
베드루 후서
요안 제一서
요안 제二서
요안 제三서
유다서
묵시록
서 언
一九三五년에 열린 전선 주교 회의(全鮮主敎會議)의 결의(決議)에 의하여 성서의 조선문 번역 간행은 덕원 성 분도회 수도원에 일임되었다. 이리하여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신약전서(新約全書) 중에서 아직 번역되지 아니한 종도들의『서간』과『묵시록』이다. 돌아보니 이에 손을 댄 후로 이미 四개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러갔다. 그 동안 남모르게 겪은 난관과 곤란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곤란을 극복하고, 이를 여러분 앞에 내어놓게 되는 오늘에 이르러, 역자는 크나큰 감격에 싸이는 것이며, 위선 천주께 감사하는 바이다.
이 번역은 라틴어의 불가타(Vulgata) 원본(原本)을 참고하여 가면서 그레시아 원문을 따라 번역된 것이다. 그런데 이『불가타 원본』에는 그레시아 원문 중에 없는 귀절이 여러 곳있다. 그러므로 역자는 이러한 것 중에 비교적 간단한 것은 중괄호[ ]안에 넣었고, 좀 긴 것은 좌우편 주해란(註解欄)에 넣었다. 성서의 본문을 아는 자는 누구를 물론하고 이를 현대어로 번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성 바오로의 서간 중에 특히 많다. 역자는 성서에 포함되어 있는 천주의 말씀을 그르칠까 두리어 본문을 자세히 또한 충실하게 번역하려고 힘썼다. 그러나 어떠한 곳은 직역(直譯)으로써는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게 되므로, 이러한 곳은 본문의 뜻을 그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의역(意譯)하였다. 그리고 또한 때로는 소괄호( )안에 어귀(語句)를 더하기도 하였고, 주해를 붙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의 조잡(粗雜)함과 난삽(難澁)함과 또한 불완전함을 면치 못하였다. 그것은 다만 문장의 아름다움만을 존중함에서, 성신께서 감도(感導)하신 말씀을 너무나 자유롭게 번역하는 것도 또한 마땅치 못한 것이라 여김에도 그 원인은 있다. 각 서간과 또한 묵시록의 본문 앞에 있은 서언(緖言)과 본문 가운데 있는 항목(項目)과 주해(註解)는 성서를 읽는 자들로 하여금 이해을 쉽게 하게 하기 위하여 역자가 붙인 것이다.
우리 조선 가톨릭 신자 중의 많은 이들이 이 성서를 - 특히 바오로 종도의 서간을 가끔 읽고 묵상하기를 나는 간원하며,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이 성서에 포함되어 있는 천주의 말씀의 씨를 각각 그 마음 속에 받아들여 풍성한 영신적 열매를 맺기를 충심으로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성학자(聖學者) 에프렘의 말씀과 같이, 논밭에서는 다만 일정한 계절(季節)에만 추수할 수 있으나, 그러나 성서에서는 우리는 그를 읽을 때마다 영원한 생명이 간단없이 솟아나오는 영신적 열매를 언제나 추수할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이 성서 번역에 있어 말로써 또한 실지로써 격려하여 주고 원조하여 준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다. 첫째로 이 번역을 부탁하신 신 주교 각하와, 이를 교열(校閱)하여 주신 당 수도원 원장 홍 신부님과, 또한 이를 대조 정정(對照訂正)하여 주신 최 병권(崔炳權) 신부님께 감사하는 바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보다도 감사해야 할 사람은 김 용학(金龍學) 군이다. 그는 四개년이나 되는 기나긴 세월에 나와 한가지로 이 성서 번역에 있어 어려움을 같이 겪고 수고를 나누었다. 성서의 어렵고 난삽한 문장을 나와 한가지로 보다 나은 조선어로 번역하기에 기울인 그의 노력은 상상하기에도 어려운 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수고하신 여러분과 또한 이 성서를 읽는 모든 이에게 천주의 강복이 풍성하게 내리시기를 비는 바이다.
一九四一년 三월 二十五일
덕원 성 분도 수도원에서
아르눌프 슐라이케르
성 바오로 종도의 서간
一. 바오로의 일생
(1) 그의 부모와 출생지
바오로께서는 유데아인인 양친에게서(로마 二·一, 필립 三·五) 그리스도 강생 후 二년 경에 칠리치아 타르소에서 탄생하셨다(종도 九·一一, 二一·三九, 二二·三). 그의 유데아인으로서의 이름은 사오로(요구되는 자라는 뜻)이었었으나, 로마 신민(臣民)이기도 하였으므로 바오로라는 로마인으로서의 이름도 있었다. 저는 신민으로서 로마인의 신민권(臣民權)을 가졌었고, 또한 그 이름도 로마인의 이름을 가지셨던 관계로 그 광대한 전 로마 제국 영토 내에서 어디를 가시든지 로마 관헌(官憲)의 보호를 받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복음을 전하실 수 있었다. 바오로의 키(身長)는 매우 작았으며(코후 一〇·一, 一二·六), 더욱 그의 체질은 허약하였었다(갈라 四·一三, 코후 一二·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거의 三十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에 긍(亘)한 종도로서의 생애로 말미암은 무수한 고역(苦役)에 견딜 수 있었다는 것은(코후 二장) 경탄(驚嘆)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육체는 극히 쇠약하였었으나, 위대한 정력(精力)과 의지(意志)만은 언제나 잃지 않으셨던 것이다.
(2) 그의 교육의 과정(過程)
바오로께서는 바리세이인들의 관례(慣例)를 따라 그 부모의 집에서 교육을 받으셨다(종도 二三·六). 그 때 그의 고향인 타르소는 통상(通商)과 그레시아 철학 사조(哲學思潮)의 중심지였던만큼, 바오로는 이미 어려서부터 헤브레아어나 혹 아라메아어 이외에 그레시아어를 배우셨다. 이 그레시아어로 말하면, 그 때에 있어서는 전 로마 제국의 어디서든지 마치 공통어(共通語)로 통용(通用)되던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더우기 자기가 후에 반박하여 싸워야 할 외교 철학에 대한 여러 가지 설(說)을 철저하게 아셨다.(종도 一七·二八). 이와 같이 그가 장차 외교인의 종도가 될 토대는 천주의 섭리하심으로 말미암아 벌써부터 착착 진행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바리세이인들의 관습에 의하여 수예(手藝)에 대한 기술(技術)-그것은 장막 제조(帳幕製造)에 대한 것이었다,-을 습득(習得)하였었다. 그가 후에 종도로서의 생애에 있어서 가끔 이 기술로 말미암아 생계(生計)를 유지하신 것도 사실이다(종도 一八·三, 二〇·三四, 三五). 소년 시대에 예루살렘에 가서(종도 二六·四), 그 때 가장 권위가 있던 법률학자 가말리엘의 문하(門下)에서 성경을 배워, 조상으로부터 전래된 법률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擁護者)가 되었었다(갈라 一·一四). 그가 그 때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뵈온 일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3) 그의 귀화(歸化)(기원 三四~三六년)
열정적 성격의 소유자인 바오로께서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우리 교회에 대하여 가장 심혹한 박해자이었다(종도 八·三, 九·一 이하), 이러한 자로서 그리스도 신자 중의 첫째 치명자이신 스데파노가 돌로써 살해될 때도 거기 참섭하였었다(종도 七·五八, 二六·九~一一, 갈라 一·一三). 그러나 다마스코에 있는 그리스도 신자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자 그리로 가시던 도중, 그는 하늘에 나타난 이상한 광채에 비추인 바 되어 천주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대한 가장 포악한 박해자로부터 귀화하여 타는 듯한 열정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종도가 되셨다(종도 九·二~一九, 二二·三~一六. 二六·二~一九, 갈라 一·一二~一六, 코전 九·一).
(4) 종도직(宗徒職)에 대한 준비 공작
바오로께서는 귀화하신 후 다마스코에서 세를 받고(종도 九·一七 이하) 아라비아로 피하여(갈라 一·一七) 三년 동안 그 곳 광야에서 당신 직책에 대한 준비를 하셨으며, 마침내 다마스코로 돌아와 그 곳 회당(會堂)에서 가르치기를 시작하셨다. 그 때 유데아인들이 그를 박해하려 하매, 신자들은 그를 광주리에 담아 성벽 위에서부터 줄을 매어 그를 내려보내어 피신케 하였다(종도 九·二三 이하, 코후 一一·三二). 그는 그 곳을 벗어나 베드루를 만나고자 예루살렘으로 가셨다(갈라 一·一八). 그러나 유데아인들의 음모로 말미암아 보름 후에는 다시 그 곳을 떠나(종도 九·二七~三〇) 그의 고향인 타르소로 가셨으며,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신 듯하다(갈 一·二一~二三, 종 九·二八~三〇). 그 후-대략 그리스도 강생 후 四二년이나 혹은 四三년경으로부터 발라바의 초청(招請)을 받아 안티오키아로 가셨으며, 그 곳에서 많은 이들을 외교중에서 회개시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가지게 하셨다(종도 一一·一九~二六). 안티오키아는 이 때로부터 성 바오로의 전교 사업의 중심지(中心地)가 되었던 것이다.
(5) 종도로서의 첫번 전교 여정(傳敎旅程)(四五~四八년)
안티오키아에 거주(居住)하시던 바오로와 발라바는 얼마 아니하여 성신의 가르치심을 좇아 말구를 동반(同伴)하시고 종도로서의 첫 여정에 오르셨다. 이 때에 들르신 곳은 치프로섬(島)을 거쳐 팜필리아와 피시디아와 리카오니아 등이다(종도 一三·四~一四·二七)
(6) 제二차의 전교 여정(四九~五二년)
예루살렘에 열리었던 종도들의 공회(公會)가 지난 후에(종도 一五·一~二九) 바오로께서는 제二차 전교 여정에 올라, 시리아를 거쳐 칠리치아와 리카오니아와 프리지아와 갈라치아를 답파(踏破)하셨다. 천주의 계시하심을 좇아 멀리 유럽에까지 이르러 필립피와 텟살로니카와 베로에아와 아테네와 코린토에까지 가셨다. 그 곳으로부터 배를 타고 에페소에 들러 다시 안티오키아로 돌아 오셨다.(종도 一五·三六~一八·二二).
(7) 제三차의 전교 여정(五三~五八년)
제三차 전교 여정에 있어서 바오로께서는 먼저 갈라치아와 프리지아를 두루 다니셨으며, 그 후에 에페소에 와 대략 三년 동안 그 곳에 머물러 계시면서 많은 이를 회개시키셨다. 그리하여 에페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전 아시아의 각주(各州)에 전파되었다. 그는 다시 그 곳을 떠나 그레시아 코린토로 가셨으나, 그 곳에서는 겨우 겨울 하나만을 나셨다. 이는 그가 로마 제국의 수도(首都)며 아울러 외교 사조(外敎思潮)의 중심지인 로마로 가고자 하신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는 로마에서 다시 이스파니아로 가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코린토를 떠나 마체도니아와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오셨다(종도 一八·二三~二一·一七).
(8) 그의 수인 생활(囚人生活)(五八~六三년)
예루살렘에 이르러 바오로께서는 신자 형제들에게는 사랑과 즐거움으로써 영접되셨으나, 많은 유데아인들에게는 미움의 적(的)이 되어 잡히어 체사레아의 감옥으로 압송되셨다. 그 곳에서 二년간의 수인 생활을 지내신 후 로마로 가서 다시 二년 동안 감시를 받아가며 지내셨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능히 복음만은 전하실 수가 있었다(종도 二一·一七~二八·三一).
(9) 수인 생활 이후의 바오로와 그의 죽음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바오로께서는 그로부터 二년 후에 석방되어 이스파니아에 전도 행각(傳道行脚)을 하셨고(로마 一五·二四. 二八), 그 후에 다시 동쪽으로 옮기어 로마로 돌아오셨으며, 다시 붙잡히어 마침내 六七년에 칼로 참형(斬刑)되셨다.
우리는 그의 업적(業蹟)을 볼 때에, 그는 실로 모든 시대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주의 사도(使徒)이며, 진리의 말씀을 온 천하에 전파하신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二. 성 바오로 서간의 전반적 요람(全般的要覽)
(1) 서간의 수효와 그 동기
바오로께서는, 그가 설립하신 교회에 대하여 목자로서의 위로의 필요를 느끼신다든지, 또는 그들에게 대한 목자로서의 사랑을 가져 친히 말로써 전한 것을 보충하고자, 또는 그를 보다 더 정확하게 선명(宣明)하고 해석하여 주시고자, 혹은 자기에게 보낸 질문에 대하여 해답하여 주고자, 또는 장차 전할 복음에 대한 준비를 하고자 하사 서간을 서술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주선과 사랑으로써 열 네 통(通)의 서간을 쓰셨으며, 이 모든 서간은 감목자(監牧者) 두 사람에게와 필레몬에게 보내신 것 이외에는 다 어떤 특수한 교회의 일반 신자들에게 보내셨던 것이다. 그는 항상 어떠한 교회가 당신의 편지를 받으면 여러 사람이 한데 모이어 그를 공공(公公)하게 낭독하고 서로 의논하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우리에게 아직까지 보존되어 내려오는 열 네 통의 서간 이외에도 그가 서술하신 서간이 더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코린토 전서 五장 九절을 보면, 이 코린토 전서 이전에 이미 저들에게 보낸 서간에 대한 말씀이 있으며, 콜로새서 四장 十六절에 의하면, 라오디치아인들에게도 서간을 보내셨던 것이 확실하다.
(2) 서간 가운데 포함된 교리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씀에 의하면, 성 바오로의 서간에는 신학상의 모든 도리가 거의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성 금구께서는 이 모든 서간을 온갖 재보(財寶)가 묻혀 있는 광산(鑛山)에 비하셨으며, 또한 샘(泉)에도 비하셨다. 대저 그것은 언제나 고갈(凅渴)됨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얼마든지 그 곳에서 퍼낼 수 있을 만큼 언제나 풍부하게 범람(氾濫)하여 있는 까닭이다. 성 아오스딩의 논술(論述)하신 은총에 대한 도리는 대개 다 성 바오로의 서간을 기초로 한 것이다. 거의 모든 서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초적 관념은 구원의 보편성(普遍性)에 대한 도리다. 곧 다시 말한다면, 유데아인이든가 외교인이든가를 막론하고 모든 이는 다 마찬가지로 천주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될 수 있다는 이것이다.
(3) 서간의 문체(文體)
성 바오로의 서간의 원문(原文)은 전부 그레시아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비록 이 말에 능통하였으나, 그 문장을 고아(高雅)하게만 하려고는 아니 하셨다. 이러한 관계로 그의 서간 중에는 가끔 우매(愚眛)한 사람으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곳이 많다(베후 三·一六). 이 그레시아말은 성 바오로께서 처음으로 사용하시더니, 마침내 그리스도 교회의 심오한 교리를 설명하는 용어(用語)가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가끔 동일한 단어를 전연 다른 의미로서 외교인들이 또한 사용하였었다.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그 말의 진의(眞意)를 깨닫기 힘든 이유는 여기 있는 것이다. 성 바오로께서는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고자 하실 때에는 항상 그를 서취(書取)시키셨다(로마 一六·二二). 그러나 종횡무진(縱橫無盡)한 그의 생각은 그를 다 기록할 사이도 없이, 새로운 관념과 비유가 떠오를 때면 그를 곧 다른 부분과 연결시켜 놓았다. 이와 같이 그는 그레시아어 문법의 규칙을 고려하지 않은 곳이 많으므로, 그 결과로는 문장이 너무 길어지고 정돈이 잘 되지 못하였으며, 깨닫기 힘든 곳이 또한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조선문 번역에 있어서도, 이미 원문에조차 불명하고 어려운 곳이 있는지라, 그를 정확히 번역할 수 없는 것도 또한 어쩔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문체의 고아하지 못한 데 대하여는 결점을 지적(指摘)하지 못할 자 없지는 아니하나, 그의 언변의 미려하고 독특한 힘은 감탄하지 아니하는 자 없는 것이다(종도 一四·一一). 그의 분방자재(奔放自在)한 선천적 구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초자연적 열정으로 말미암아 가장 아름다운 말과 가장 고아한 노래로써 가끔 열렬하게 되었었다(로마 八·三五~三九, 코전 一三장). 그러므로 성 예로니모께서는 말씀하시기를,『바오로 종도의 서간을 읽을 때면, 그 말씀이 내게는 말씀으로 들리지 아니하고 오직 벽력(霹歷)으로 들려옴을 나는 깨닫노라』고 하셨다.
(4) 서간의 외면적 구조 형식(構造形式)
성 바오로 서간의 표면적 형식은 그레시아와 로마인들의 서한체(書翰體)를 본받았으니, 그 서간은 모두(冒頭)와 본문과 마지막 인사로 구분되어 있다. 모두에는 발신인(發信人)의 성명과 문안과 감사와 신자들을 위한 기구 등이 포함되어 있고, 본문은 보통 두 부분에 나뉘었으니, 첫 부분(교리에 대한 부분)은 신앙의 진리에 대한 것이요(로 一·一八~一一·三六), 둘째 부분(도덕에 대한 부분)은 그리스도 신자다운 생활의 규칙에 대한 것이다(로 一二·一~一五·八). 그리고 마지막에는 친우나 혹은 신자들의 문안을 일일이 지명하여 기록하셨다(로 一六·一~一五). 그리고 그 외 사사로운 친분(親分)에 대한 사정 등도 쓰이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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