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영혼에게서 온 편지...
An Introduction by Claire
다음 설명은 독일의 한 수녀원에서 어느 수녀의 유품 가운데 발견된 서신의 내용이다.
젊었을 때 우리 집 부근에 사는 앤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동료이자 친구였다. 언제나 붙어 다녔다. 앤이 결혼을 하고 나서 나는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우리는 진정한 우정이 아니라, 단지 우호적인 관계였던 것 같다. 어쨌든 앤은 결혼을 하고, 우리 집에서 멀리 떨어진 더 좋은 동네로 이사를 떠났고, 나는 떠난 그녀를 그다지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1937년 9월 중순쯤 어머니께서 어떤 소문을 듣고 나에게 편지를 썼을 때, 나는 가르다 호수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앤이 죽었다더라. 교통사고였는데, 어제 M. 공동묘지에 장사했다더라.’
나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아는 앤은 한 번도 신앙심이 깊었던 적이 없었다. 갑작스레 주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녀는 어떤 준비가 되어있었을까? 다음날 아침 나는 내 숙소가 있던 수녀원에서 미사를 돕고 있었다. 나는 미사 중에 앤의 영생을 구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기도하였으며, 성체를 영하였다.
그 날 하루종일 마음의 안정이 되질 않았고, 밤에 잠도 설쳤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얼른 불을 켜고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시계는 자정에서 10분 정도 지난 시간이었다. 주위는 너무도 조용하였고,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원 넘어 가르다 호수에서 단조롭게 들려오는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유일한 소리였다.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다른 무슨 소리를 들었다. 숨 막히는 분위기가 마치 내가 전에 일하던 사무실에서 매니저가 나에게 힘든 업무를 나의 의사도 무시한 채 던져주려는 그런 답답한 분위기가 떠올랐다.
일어나서 둘러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너무도 주위가 너무도 조용하였기에, 그 생각을 접었다. 아마도 내 친구의 죽음을 듣고서 내가 흥분한 탓에 예민해진거라 생각했다. 나는 몸을 굽혀 천주님께 연옥의 불쌍한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바친 후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곤 꿈을 꾸었다. 아침 미사를 드리러 가기 위해 아침 6시에 일어나는 꿈이었다.
내 방문을 열고 나서다 편지가 든 꾸러미를 밟았다. 편지를 들었고, 그 편지는 앤의 필체였다. 너무 놀라 소리쳤다. 내 손가락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너무도 두려운 생각에 주님을 부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숨이 막힐듯한 순간이었고, 신선한 공기가 무엇보다 필요하였다. 서둘러 나갈 채비를 마치고, 편지를 가방 속에 넣고서 집을 도망치듯 나섰다.
한걸음에 나는 올리브 나무들과 월계수 나무들, 농장들을 지나고, 유명한 가르데사나 고속도로를 지나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갔다. 아침 햇살이 점점 더 밝아지면서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다른날 같으면, 가르다섬과 호수의 멋진 광경에 홀려 백여 걸음 걷다 멈추곤 했던 아름다운 길이었다. 반짝이는 푸른 물결은 마치 경외하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처럼 나를 들뜨게 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평소 같으면 호수 건너편에 우뚝 서있는 잿빛의 발도산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던 곳이다.
하지만 이 아침엔 주변의 모든 경치가 보이지 않았다. 15분 정도 걸은 후, 강둑의 두 삼나무 나무 사이에 주저앉았다. 이곳은 전날만 하더라도 레이디 데레사의 소설을 읽으며 즐거워했던 곳이다. 처음으로 나는 삼나무를 죽음의 상징처럼 느끼게 되었다. 이 나무들은 이 지방에서 흔한 나무였기에 전에는 특별하게 보지도 않았던 나무들이었다.
나는 지갑에서 편지를 다시 꺼냈다. 서명은 없었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앤의 필체였다. 그녀가 전에 사무실에서 Mr. G.를 놀리기 위해 사용하였던 갈겨쓴 S나, 프랑스풍의 T. 모두 앤의 필체였다. 이는 그녀의 평소 모습과는 많이 다른 장난스런 모습이었다. 그녀는 파란 눈과 우아한 코를 가진 매우 상냥하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종교적인 주제에 대해 토론할 때에는 그녀는 지금 편지에서의 필체처럼 빈정거리고 무례하였다.
지금 이것은 장막너머에서 온 앤의 편지이다.
장막너머에서 온 편지
클레어!
나를 위해 기도하진 말아. 나는 저주받았어. 우정 때문에 너에게 나의 사정과 내가 지은 죄를 말하려 하는 것은 아니야. 이곳에는 어떤 종류의 사랑도 없어. 나는 지금 “결코 악을 원치 않고 항상 선을 행하는 권능”의 지시를 받고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사실 나는 여기서 너를 보고 있어. 이 순간이 영원히 되었으면 좋으련만. (1)
(1)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98권 4호 : “그러므로 저주받은 것들은 모든 선한 이들이 저주받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너무 놀라지 마. 우리는 여기서 언제나 같은 것만 생각해. 우리의 꿈은 너희가 “악”이라 하는 것들에게서 무감각해지는 것이야. 우리가 “선함”을 행할 때조차, 지금 내가 너희에게서 지옥에 대한 눈을 뜨게 하려는 짓 같은, 이 또한 좋은 의도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야. (2)
(2) 지옥에 있는 의지의 모든 행동이 악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의도적 의지와 자연적 의지로 구분한다: “그들의 천성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창조자의 것이다. 우리가 자연의 의지라고 부르는 이런 경향을 누가 자연에게 주었느냐. 아직 자연이 남아있기에 그들 안의 자연의 의지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의 의도적 의지는 이런저런 영향으로 키워왔기에 그들 자신의 것이다. 이 의지는 항상 악이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바른길에서 완전히 돌아섰기에, 악의 의도가 아니고서는 결코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설령 선을 행하려 마음먹더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신학대전. 98권 1호
우리가 M에서 같이 일하던 때가 생각나니? 그때 너는 23살이었고, 나보다 반년 앞서 들어왔었지. 너는 친절하게도 여러 차례 나를 도와주었고, 내가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준 것을 알고 있어. 그런데 “선함”이라는 뜻이 무엇인지 아니? 당시 나는 너의 “관용”을 칭찬했었지. 거짓말이었어! 너는 너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려 나를 도와줬다고 나는 생각했었지. 여기서는 아무도 선함을 몰라!
어렸을 때의 나를 잘 알겠지만, 나는 확실한 것만 말할게. 내 부모님의 계획대로라면,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거야. 내 부모의 부주의 때문에 원치않는 임신을 하였고, 내가 태어났어. 내가 태어났을 때, 내 언니들은 이미 14살과 15살이었어. 나는 아무도 원치 않게 태어난거야! 이 순간 나는 나의 존재를 지웠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이 고통도 없었을거야! 모든 것이 타버려 재로 없어지듯이 내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으면 그것보다 기쁜 일은 없을거야. (3) 하지만 나는 존재하고 있고, 내가 한 일을 책임져야해.
(3)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를 없애는 사악한 짓이지만, 불행을 벗어날 수 있고, 더 큰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겠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98권 a.3,
내 부모님들은 결혼하기 전에 시골 마을에서 도시로 이사를 갔어. 그리곤 교회에서도 멀어졌고, 신앙이 없는 이들과 어울렸어. 그들은 무도회에서 만났고, 만난지 6개월 만에 결혼할 수밖에 없었지. 결혼식에서 몇 방울의 성수가 내 부모님에게 떨어졌고, 우리 부모님은 일 년에 몇 번만 일요일 미사에 참례했어. 내 어머니는 나에게 올바른 기도문 하나 가르치질 않았어. 우리의 경제 상황이 그리 어렵지 않았음에도 내 어머니는 물질에 대한 욕심에 스스로를 가둬버렸지.
나는 교회에서 쓰는 단어들, 기도, 미사, 성수, 그리고 성교회 같은 단어들을 입에 담기도 싫을 정도로 혐오했어. 나는 평범하게 누구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교회에 가는 이들을 혐오해왔어.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은 고문이야. 죽음으로서 우리가 알게된 모든 것들, 삶에 대한 기억들,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지금은 우리를 괴롭히는 뜨거운 불꽃이 되고 있어. (4)
(4) “따라서 지옥에 있는 자들은 일어난 모든 일들이 슬픔의 원인이 될 뿐이지, 기쁨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저들은 저주받아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과 빛나는 보물을 잃어버린 것이 자신이 저지른 죄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저들은 지옥의 고통과 더불어 잃어버린 보물 때문에 더 괴로울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98권 a.7.
모든 기억들은 우리가 은총을 거부했기에 오싹거릴 정도로 싫은 광경만 떠오르고 있어. 이것들이 지금 우리를 더욱 괴롭게 만들어! 우리는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아. 우리는 너희가 생각하듯 인간의 다리로 걷지도 않지. 영혼의 상태로 묶인 우리는 잘못 허비한 우리의 삶 때문에 끔찍한 공포를 마주 보며, 이를 갈고 울부짖고, 서로를 증오하며 고통받고 있어.
내 말 듣고 있니? 여기서 우리는 물처럼 증오를 마시고 있어. 우리는 모두 서로를 싫어해. (5)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미워해.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너에게 꼭 알려 주고 싶었어.
(5) 천국에 있는 이들이 가장 완벽한 사랑이 있듯이, 지옥에 있는 자들은 가장 완벽한 미움을 가지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98권 a.4.
천국에 있는 축복받은 이들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할거야. 저들은 그분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을 항상 느끼기 때문이지. 분명 저들을 행복하게 만들거야. 우리도 잘 알고 있어. 잘 알기에 우리는 더욱 분노하게 돼. (6)
(6) “심판일이 오기 전에 지옥에 떨어진 저주받은 이들은 영광 속에 있는 축복받은 이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영광이 좋고 나쁘고 판단하기 전에 저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한 상태가 영광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행복 때문에 축복받은 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자신이 영광을 빼앗겼다고 생각하여 축복받은 이들을 저주할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98권 a.9.
지상에서 사람들은 창조와 계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지만, 이를 강조하지는 않아. 신자- 이 단어를 말할 때 나는 분노에 끓어오르고 있지. -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묵상하는 신자라면 그를 좋아할거야.
그러나 하느님이 심판자이자 응징자로서 올 때, 신을 거부한 영혼들은 신을 미워하겠지. 우리도 신을 미워하고 있어. (7) 그 영혼들은 삐뚤어진 의지를 가지고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미워하지. 저들은 지상에서 삶을 다할 때까지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신을 거부하였기에, 저 세상에서도 영원히 하느님을 부정하고 미워하지. 의지의 이 삐뚤어진 행동은 절대로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결코 철회할 생각이 없어.
(7) “저주받아 지옥에 떨어진 자들은 신이 자신들의 사악함 (사악한 짓을 벌이려는 생각만으로도) 에 합당한 징벌과 심판을 하신다는 것만 뺀다면, 신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저들은 신은 자신을 처벌하고 응징하는 대상으로만 보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98권 a.8.
나는 지금 하느님이 여전히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고 억지로 강조하여야 해. 내가 ‘억지로’라고 한 것은 내가 자진해서 이 편지를 쓴다 해도, 내가 하고픈 거짓말 같은 것을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이야. 내가 이 편지에 쓴 글 중 많은 양이 내 뜻과는 달라. 나는 또한 너와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쏟아내고 싶은 욕설과 모욕을 참아야 하지.
하느님은 우리가 지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악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단 점에서 우리에게도 자비를 베푸셨지. 만약 그렇게 하도록 놔두셨더라면, 우리가 받을 징벌이 훨씬 커졌을 거야. 신은 우리 같은 자들 중 일부는 일찍 죽게 허락했어. 나처럼.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덜 가도록 했지.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당신께 가까이 오도록 우리에게 강요하시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옥의 가장자리에 있도록 해서 그나마 고통을 조금은 덜 수 있어. (8)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 하면 내딛는 걸음마다 지금 받는 불의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받게되지.
(8) “지옥에 떨어진 저주받은 자들이 그 죄를 완전히 덜지는 못하나, 합당한 범위 안에서 경감되기는 한다.” 또 다른 저서에서 성교회의 거룩한 대학자는 지상에 있을 때에 다른 이에게 자비를 베푼 이에게 해당한다고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21권 a.4., 99권 a.5.
내가 첫영성체를 앞두고 아버지가 내게 해준 말을 너에게 들려주었을 때 너는 무척이나 놀라했지: “앤, 정말 예쁜 드레스를 입는 것에만 신경 쓰도 록 해라.” 그리곤 아버지는 말했지. “나머지는 모두 쓸데없는 가짜다.”
그 말을 했을 때, 네가 무척 놀라는 모습을 보고 무척 창피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그 엉터리의 가장 중요한 점은 12살이 되어야 첫영성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야. 그 나이 때 나는 이미 세상의 즐거움을 충분히 안 상태여서, 성찬식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7살에 첫영성체를 받게 하려는 새로운 관습이 허용되는 것에 우리는 매우 분노하고 있어. 우리는 이 관습을 좌초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쓰고 있지. 사람들이 아이가 성찬식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믿게 하거나, 아이들이 성찬식을 받다 성체 모독의 큰 죄를 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도록 애쓰고 있어.
하얀 성체가 믿음과 희망, 사랑 그리고 세례의 결실로 받아들여 진다면 훼손도 덜할 것이다 – 나 또한 성체에 침을 뱉었었지! - 하지만 순진한 어린아이들의 마음에 새길 수만 있다면. 내가 지상에 있을 때 이런 생각을 말한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니?
아버지. 그는 어머니하고 많이도 싸우셨지. 창피한 얘기라서 너에게 말하진 못했어. 창피함을 아냐고? 웃기는 소리. 여기 우리도 너희와 크게 다르지 않아.
첫영성체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부모님들은 각방을 쓰셨어. 나는 어머니랑 잤고, 아버지는 따로 다른 방에서 주무셨어. 아버지는 밤새 집을 들락거리셨지. 날마다 엄청난 술을 마셨고, 결국 가진 모든 것을 탕진했어. 내 언니들은 살기위해 돈을 벌어야 했지. 내 어머니도 일을 나갔어. 그녀는 쓰디쓴 인생의 마지막 해에는 돈을 안준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자주 심한 손찌검을 당하셨어. 그런데 그런 아버지도 나한테 만은 정말 친절하셨지.
이 모든 것을 언젠가 너에게 말했을 때, 너는 나의 변덕스런 태도를 질책했었지. -그런데 왜 나를 비난했니? - 어느 날 신발이 마음에 들지 않아, 두 켤레를 가져왔을 때처럼.
어느 날 밤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돌아가셨어. 그때 나는 너의 해석을 듣고 싶지 않아 하지 않은 말이 있었어. 오늘 너에게 그 말을 하려 해. 사실 내 영혼의 잔혹한 면이 처음 드러난 일이라서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
나는 어머니의 침실에서 자고 있었어. 어머니의 숨소리를 감안하면, 상당히 깊은 잠에 빠졌을 거야. 그때 갑자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 그리곤 그 목소리가 “네 아빠가 죽는다면 어떨 것 같니?”라고 했어.
내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린 이후부터 나는 더 이상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었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었어. 나에게 친절한 사람들에게만 약간의 애착이 있었을 뿐이야. 축복의 은총을 입은 사람 외에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드물다고 생각해.
“아버진 죽지 않을 거야.” 그 의문의 목소리에 대답했어. 짧은 시간이 흐르고, 다시 똑같은 질문을 해왔어. 그 목소리에 대한 경계심도 없이 나는 또 대답했어. “상관없어. 아버지는 죽지 않을 거야.”
세 번째 질문이 들려왔어. “만약 네 아버지가 죽는다면?” 순간적으로 많은 장면들이 내 마음을 지나갔다. 아버진 항상 취해서 집에 들어오시지. 그리곤 어머니에게 심한 잔소리와 싸움을 거시지. 자주 이웃들과 친지들 앞에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드셨지.
나는 울부짖으며 소리쳤어. “알았어. 이건 다 아버지가 자초한거야. 아버지를 죽게 해줘!”
그 다음에 모든 것이 계속되지. 아침이 되고, 어머니가 위층의 아버지 방에 가셨는데, 방문이 잠겨있었어. 정오쯤에 사람들이 방문을 힘으로 열었어. 아버지는 침대에 옷을 반쯤 입으신 채 쓰러져 계셨어. 돌아가셨어. 시신만 남으신거지. 아마도 지하실에서 맥주를 찾다 독감에 걸리신 것 같아. 이미 오랫동안 아프셨던거야. (만약 어떤 이가 아이 때 약간의 선한 일을 하였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의 아이 때 의지를 잊지 않고 회개 할 수 있도록 시간과 기회를 더 주셨을까?)
마르타 K.와 너는 나를 젊은 여성을 위한 모임에 가입시켰지. 물론 모임은 충분히 흥미로웠지만, 두 관리자들의 우스꽝스런 지시에 대해서 너에게 말한 적은 없었지. 어쨌든 나는 빠르게 그 모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어. 우쭐해졌지. 또 나는 모임의 즐거움도 알게 되었지. 나는 가끔 고백성사를 보고 성체를 영하기도 했어. 하지만 사실 죄를 용서받으려 고백성사를 본 것은 아니야. 나는 내 생각이나 감정을 말하는 것이 서툴렀어. 하지만 이때까지는 더 나빠지지는 않았어.
하루는 네가 나에게 충고했지: “앤, 기도하지 않으면 길을 잃고 말거야.” 맞아 사실 나는 거의 기도하지 않았어. 기도는 언제나 성가시고 골치 아픈 도구라고 생각했어. 네가 옳았어. 지옥에서 불타고 있는 영혼들은 기도를 전혀 하지 않았거나, 조금밖에 하지 않은 영혼들이야. 기도가 하느님께 다가가는 첫걸음이야. 기도는 언제나 중요해. 특히 주님의 어머니에게 기도해야 해. 우리는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어. 그녀에게 바쳐지는 기도는 악마에게 떨어졌을 많은 영혼들을 구하고 있어.
증오하지만 계속 말할게. 기도는 인간이 지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야. 하느님은 이 간단한 행위를 구원과 연결하셨지. 기도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조금씩 조금씩 많은 빛과 힘을 주시지. 이 빛과 힘은 그가 죄악의 늪에 가슴까지 빠졌을지라도 꺼내서 일으켜 구원해줄 수 있는 은총이야. 사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전혀 기도를 하지 않았어. 그리고 난 스스로 나를 구원해 줄 은총을 버려버렸어.
여기선 아무런 은총을 받지 못해. 아니 은총을 주신다 해도 우리는 경멸하며 걷어 차버릴 테지만. 세속에서의 마음의 동요는 장막을 넘어오면 끝이나. 세속에서 인간은 죄악의 삶에서 얼마든지 은총의 삶으로 건너갈 수 있지. 또한 은총의 삶에서 언제든지 죄악으로 떨어질 수도 있어. 나 또한 점점 약해져서 악에 빠지게 되었어. 그러다 죽음과 함께 이 ‘예’, ‘아니오’의 끝없는 순환도 끝나게 돼. 죽음과 함께 모든 선택들은 고정되고 불변의 상태가 되지.
나이가 들수록 이 선택의 순간이 적어지지만, 죽는 순간까지 하느님 앞으로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가 있는 것이 사실이야. 하지만 인간들은 죽음 앞에서 마지막 결정을 내릴 때, 기계적으로 그가 일생동안 해왔던 방식 그대로 결정을 내릴거야.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습관은 제2의 본성이 되어 마지막 순간에도 사람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한다. 나도 그랬어. 나는 몇 년을 하느님과 멀어져 살았어. 결과적으로 나는 은총의 마지막 부름을 받았을 때, 나는 하느님을 등지는 결정을 하였지. 이는 내가 너무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회개하는 습관을 잊었기 때문이야.
네가 언제나 설교를 잘 듣고, 좋은 책들을 읽기를 권유했지만, 나는 항상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빠져나갔어. 내면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해 나는 무슨 일을 했을까?
내가 젊은 여성을 위한 모임에서 떠나기로 마음먹을 무렵이 내 인생에서 위기의 순간이었다고 생각해. 하지만, 내가 그 때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도 어려웠다고 생각하지. 나는 불안하고 불행했었어. 당시 나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회개의 길에 거대한 장벽을 세우고 있었어. 너는 나에게 잘 말하면 금방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앤. 고백성사를 보도록 해. 그러면 모든 일이 해결 될거야.” 네 말이 틀리지 않았지만, 이미 세상과 육신과 악마는 내 손을 꼭 잡고 한 몸처럼 되었을 때였어.
당시 나는 악마를 믿지 않았지만, 지금 나는 악마가 나에게 한 짓을, 악마가 인간들에게 큰 힘과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어. (9) 오직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의 많은 기도와 희생과 속죄만이 악마를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해. 그리고 그때에도 서서히 물러나지.
(9) 사탄과 악마는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사악한 영혼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저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에는 성경의 두 구절로도 충분하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베드로1. 5:8)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잇는 악령들입니다.” (에페. 6:11-12)
신체를 악마에게 내어 준 사람은 별로 없지만, 영혼을 악마에게 내어준 이는 많다. 하지만 악마도 자신의 영향력에 넣은 이들조차 자유의지를 빼앗을 수 없다. 신은 자신을 완전히 배신한 자들에게 내리는 징벌로써, 저들이 악마에 지배를 받는 것을 허락하셨다.
나는 악마가 싫어. 하지만 악마는 함께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과 함께 그의 조력자들을 이끌고 너희의 영혼들을 타락시키는 것은 너무도 좋아. 세상에는 수많은 악마들이 있어. 정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악마들이 파리떼처럼 세상을 휩쓸고 다니는데, 아무도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어. 우리처럼 저주받아 지옥으로 떨어질 영혼들이 너희 인간들을 유혹하는 게 아냐. 그 임무는 타락한 영혼들이 맡고 있지. (10) 저들이 또 다른 영혼들을 지옥으로 끌고 올 때 우리의 고통도 증가하지. 하지만 우리는 인간들이 지옥의 판결을 받는 것을 보는 것이 더 좋지! (11)
(10) “지옥에 떨어진 자들을 악마처럼 다른 영혼들을 지옥으로 끌고 오는 일에 이용하지는 않는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98권 a.6.
(11)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의 수가 증가하면, 각 영혼들이 받는 형벌은 증가하지만, 그럴수록 저들의 증오와 질투는 훨씬 더 커질 것이고, 그래서 저들은 고통을 덜 받는 것보다는 더 많은 영혼들이 지옥의 고통을 받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98권 a.4.
나는 하느님을 피해 숨으려 했지만, 주님이 나를 찾으셨어. 나는 내 본성의 자연스런 경향에 맞게 자연스레 자선을 베풀어 은총의 길에 들어가려 했어. 가끔 자선을 베풀기도 했지. 때로는 하느님이 나를 성당으로 데려가기도 했어. 사무실에서 힘들게 일한 후 귀가해 아픈 어머니를 돌볼 때, 나는 힘든 걸 몰랐었어. 그런 생활이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었어. 그때 나는 하느님의 깊은 은총을 받았었지.
한 번은 네가 점심 휴식시간에 나를 종종 데려갔던 병원 안 성당에서 회개의 길에서 떨어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나는 마음이 너무 슬퍼서 울고 말았어. 하지만, 세상의 쾌락은 곧바로 큰 해일을 만들어 나를 휩쓸고, 조금 남아있던 은총마저 앗아 가버렸어. 가시가 밀을 삼켜버렸지. 사무실에서 들은 종교는 감상주의라는 말로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다른 많은 이들처럼 나는 은총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렸어.
한번은 내가 교회에서 무릎을 꿇지 않고 머리만 까닥거렸다고 네가 나를 나무란 적이 있었어. 너는 그 행동이 축성된 성체 속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믿지 않는 것이라며, 게으르고 경망스런 행동이라 했었지. 지금은 징후와 느낌으로 태풍이 오는 것을 믿듯, 그리스도의 현존을 자연스레 믿어.
그동안 나는 내 마음대로 신앙을 만들어냈어. 사무실에서 일반적인 견해로는 영혼은 죽어도 다른 존재로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고, 끝없이 죽고, 다시 돌아오는 윤회론이 지배적인 견해였었어. 나는 이 의견이 너무 좋았지. 이 이론으로 나는 현세에서 나를 괴롭힐 문제는 이제 없다고 생각하였고, 모든 어려운 문제들을 덮어 버렸지.
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가고 다른 이는 죽어서 지옥에 가는 부자와 라자루스의 우화가 왜 그때는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생각이 났어도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지금 나는 그때 너의 충고를 귀담아들었으면 하며 후회하고 있어.
조금씩 나는 신의 존재를 내 마음속에서 밀어내고 있었어. 나는 신의 모습도 내 마음대로 변화시켰고, 다신교적 입장에서 신들을 만들어냈고, 심지어 나 자신도 신이 되었어. 신앙을 되돌려야 할 의지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어.
내가 만들어 낸 이 “신”은 더 이상 나에게 천국을 주지도, 두려워했던 지옥도 없었지. 나는 신을 떠났던 거야. 여기까지가 내가 하느님을 대했던 태도였어.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쉽게 믿지. 시간이 흘러도 나는 내가 믿는 것에 더욱 큰 확신을 가졌어. 이런 종교라도 나는 큰 불편 없이 세상을 살았어.
오직 한가지만이 나를 정신 차리게 해주었어. 그건 오랜 시간에 걸친 깊은 고통이었어. 이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어. 지금 너는 “누가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하느님은 누굴 벌하시는가?”의 의미를 알겠니?
7월 어느 여름날 젊은 여성들의 모임에서 나들이를 계획했었어. 맞아, 나도 이 소풍을 좋아했었어. 하지만 그 모임에 경건한 복자들만 있지는 않았어! 나는 당시에 내 마음속의 제단에 은총의 성모님이 아닌 다른 형상을 모시고 있었어. 근처 사무실의 Max N.의 남자다운 모습이었어. 우리는 몇 번 대화를 나눴었어. 그는 소풍계획이 잡힌 일요일에 나를 초대했었어. 그의 여자 친구는 병원에 입원해있었지.
그가 나를 주시하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와 결혼할 생각은 없었어. 그는 부유했지만, 내 생각에 그의 주위에 너무 많은 여자들이 있었어. 그때까지 나는 나만을 사랑해 줄 사람을 찾았고, 나 또한 한 사람만을 사랑하려 했었지. 그래서 우리사이에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어.
(이건 사실이다. 앤은 종교적 관심사에는 무관심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보수적인 면도 있었다. 앤과 같이 ‘성실한’ 사람들도 신을 만나기에 충분히 진실되지 못하다면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맥스는 둘만의 소풍날부터 나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어. 물론 우리의 대화가 다른 정상의 연인들과는 분명 달랐어. 다음날 사무실에서 같이 나들이를 가지 않았다고 나를 나무랐었지. 그때 나는 일요일에 기분 전환한 일에 대해 너와 토론했었지.
너의 첫 번째 질문은: “미사는 갔었니?” 얼마나 어이없는 소리인지! 아침 여섯 시에 소풍을 떠나기로 했는데 어떻게 미사를 갈 수 있었겠니? 그때 내가 너를 화나게 만든 말을 했었지. “선한 신은 당신의 풋내기 사제들처럼 비열하지는 않아!” 허나 지금은 이 말을 바로 잡아야겠어. 하느님은 무한히 선하신 분이시지만, 그 어떤 사제들보다 모든 일을 훨씬 더 세심하고 진지하게 바라보신다는 것을 말해야겠어.
맥스와 함께 소풍을 다녀온 후, 나는 한 번 더 모임에 참가했었지. 나는 크리스마스의 엄숙함과 장엄함을 많이 사랑하지만, 나는 이미 내면에서는 이런 장엄함도 밀어내고 있었지. 나는 그런 것보다 영화, 춤, 그리고 여행 같은 것에 관심을 빼앗겼어. 때때로 맥스와 다툼도 있었지만, 나는 맥스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지.
내 연적은 병원에서 퇴원한 후, 나에게 화가 나 있고, 불쾌해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녀의 분노가 나에게는 유리했었지. 맥스는 나의 침착함과 조심스러움에 감동하였고, 그는 그녀보다 나를 선택했지. 나는 그녀를 하찮게 보이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어. 나는 조용히 이야기했어. 상당히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말 속에 엄청난 독을 숨기고 있었지. 이런 암시와 행동은 사람을 지옥으로 이끄는 지름길이지.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극악무도한 짓이었어.
내가 왜 이런 얘길 할까? 내가 어떻게 하느님에게서 나를 완전히 떼어 놓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야. 사실 이를 위해 맥스와 더 친해질 필요도 없었어. 내가 좀 더 빨리 나 스스로를 낮추면 맥스가 나를 좀 더 생각할 줄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스스로 참고 양보했지. 사실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어. 나는 맥스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어.
우리는 서서히 사랑에 빠졌어. 우린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한거야. 나는 훌륭한 이야기꾼이 될 재능을 타고 났었어. 적어도 우리가 결혼하기 몇 달 동안은 맥스는 나만 사랑했고, 내 뜻대로 되었지.
하찮은 피조물을 나의 신으로 만드는 것, 이렇게 나는 하느님을 배신했어. 물질적인 사랑만 원한다면, 서로 다른 성별의 두 사람만 있다고 완벽해지지 않아. 이 물질적인 사랑을 얻기 위해 유혹과 가시와 독과 같은 사람이 된거야. 결국 맥스는 나를 ‘흠모’하였고, 나를 숭배하는 열광적인 신도가 된거지.
내 인생의 이 시기에도 나는 겉으로는 점심시간에 성당도 다니고, 어리석은 성직자들의 설교도 들으며, 묵주기도도 하며, 다른 여러 어리석은 짓들을 보여주며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었어.
네가 이러한 나의 모습을 격려하느라 노력했었지. 하지만 최종 분석단계에 이르면 나는 이런 모든 것들을 의심 없이 믿는 일은 없었어. 나는 단지 내 배교를 정당화하여 내 양심을 편안하게 하려는 생각밖에 없었지. 내 영혼 깊은 곳에서는 이미 하느님께 반기를 들었던거야. 너는 알아차리지 못했어. 아직도 내가 가톨릭 신자라고 믿고 있잖아. 나는 그렇게 보이고 싶었고, 나를 해치지 못할 작은 보험으로 여겨 성교회에 기부도 했지.
사람들은 너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나 나에게 와서 너를 찾았지. 나는 네가 항상 옳지는 않다고 생각해. 이런 점이 우리 관계를 나쁘게 했고, 내가 결혼하면서 우리의 관계가 멀어졌을 때, 이별의 고통이 그리 크지 않은 이유가 되었지. 결혼식 직전 나는 고백성사와 성체성사를 거행했지만, 그건 그냥 형식일 뿐이었어. 내 남편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졌어. 우리는 이 예식을 그냥 다른 것들과 같이 단지 결혼식의 한 과정으로 취급했어. 너는 “합당하지 않다”고 할거야. 하지만 이 “합당하지 않은” 성만찬으로 나는 더 큰 마음의 평화를 얻었어. 그리고 이 성사는 내 인생의 마지막 성사였어.
우리 결혼 생활은 대체로 화목했어. 우리는 모든 일에 같은 의견을 냈어. 아이들에 대한 의견도 일치했지. 우리는 부담되는 일이 싫었어. 남편은 속으로는 아이를 하나 원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어. 나는 남편의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조차 지울 수 있었지. 나는 좋은 옷과 가구, 부인들과 티타임, 자동차 여행, 그리고 다른 재미있는 것들에만 관심 있었어. 어쨌든 결혼해서 갑자기 죽은 1년간 나는 정말 재미있게 살았어.
매주 일요일엔 우린 드라이브를 하거나 남편의 친지를 방문했어. 그때 나는 내 어머니가 창피해졌어. 겉으로 보기에 남편의 친지들은 우리처럼 인생을 잘 헤쳐 나가는 듯 보였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저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무언가 항상 내 영혼을 물어뜯는 느낌이었어. 나는 미래에, 먼 미래에 내가 죽어야만 이 느낌이 끝이 날거라 생각했어.
어릴 때, 착한 이들의 행동은 주께서 꼭 보상을 내린다는 설교를 들은 적 있어. 만약 다음 생에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면, 현생에서 상을 주시겠지. L이모로부터 생각지도 않은 유산을 상속받았어. 남편의 월급도 크게 올랐지. 덕분에 우린 새집을 쉽게 장만했어.
내가 가진 종교에 대한 애착은 다 사라졌지. 마치 먼 지평선의 자그마한 깜박거리는 불빛이 사라지듯 말이야. 도시의 술집과 카페가, 여행 중 먹었던 레스토랑이 우리에겐 하느님보다 더 친밀했어. 우리가 만난 친지들은 모두 우리처럼 살았고, 영혼의 문제보단 외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
한번은 여행 중 유명한 성당들도 들렀는데, 단지 유명한 예술품을 관람하기 위해서였지.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중세 종교의 장엄한 기운이 싫어서 조그만 꼬투리를 잡고 조롱하기도 했어. 가이드를 한 평신도를 놀리기도 했고, 경건해야 할 수도승들이 술을 만들어 판다고 비난하기도 했고, 성당의 종소리는 돈을 뜯으려 신자들을 부르는 소리라고 헐뜯었어. 결국 나는 나를 찾아오는 모든 은총을 부정했지.
특히나, 지옥에 대한 서술이 있는 책들이나 공동묘지, 어떤 곳에서 수많은 희생 영혼들을 끌고 노랗고 붉게 타오르는 불 속으로 던져 넣는 긴 꼬리를 가진 악마에 대한 묘사가 보이면 마구 조롱하곤 했지. 그런데, 클레어! 지옥들에 대한 묘사는 모자라면 모자랐지, 절대 과장된 설명이 아니였어.
무엇보다도, 지옥 불에 대해서는 항상 비웃었었어. 내가 장난으로 성냥불을 코밑에 대고 “지옥 불의 냄새가 이럴까?” 라고 했던 거 기억나니? 그때 너는 급히 성냥불을 불어 꺼버렸지만, 여기서는 아무도 불을 끌 수가 없어. 다른 걸 말해 줄게 – 성경에서 묘사된 지옥의 불은 단지 양심의 고통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야. 불은 불이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나로부터 떨어져 나간 자, 영원한 불 속에서 저주받으라.” 그 말씀 그대로야.
“영혼이 물질인 불에 탈 수 있을까?” 이런 생각하지 않니?
어째서 지상에서 불 속에 손가락을 데었을 때의 고통을 네 영혼이 받을까? 영혼은 불타지 않아. 하지만 인간이 느끼는 모든 고통은 그대로 느끼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존재와 능력 그대로를 가지고 불 속에 갇혀있어. 우리의 영혼은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능해. 우리는 원하는 것을 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어. (12) 물질의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이 신비를 이해하려 애쓰지 말아. 지옥의 불은 낭비되는 일이 없이 타오르지.
(12) “따라서 우리는 영혼이 어떻게 화제로 육체적인 고통을 받게 되는지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앞서 말한 모든 방식을 모아야 한다: 이 불의 본질은 장소와 그 장소에 속한 모든 것들, 형체가 없는 영혼조차 태울 수 있는 불이다: 신성한 신의 정의의 도구로 사용되는 이 불은 그 장소에 묶여 실제로 영혼들에 상처를 입히며, 이 불에 상처입은 영혼은 불의 고통을 그대로 입게된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70권 a.3.
우리의 가장 큰 고통은 우리는 절대 하느님을 볼 수 없다는 점이야. 지상에 있을 때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우리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날카로운 칼이 탁자 위에 놓여 있어도 너희는 그 위험을 알지 못하지. 날카로운 칼날을 봐도, 그 위험을 느끼지 못하지. 하지만 날카로운 칼날이 네 육신을 찌른다면, 너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게 될거야. 그렇듯 우리는 이전에 단지 하느님이 없구나 하였지만, 지금 우리는 그 빈자리를 온몸으로 느끼지. (13)
(13) “하느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하느님만큼 큰 고통이 된다.” - 성 오거스틴, Bibliotheca concionatorum (Venice, 1786)
모든 영혼이 똑같은 고통을 받는 것은 아니야. 하찮고, 심술궂고, 단호한 이가 죄에 빠지면, 하느님의 상실이 더 큰 무게로 영혼을 짓누르게 되고, 학대받는 피조물보다 더 큰 고통을 받게 될거야.
지옥에 떨어진 가톨릭 신자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은총과 빛을 받았기에, 일반적으로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에 비해 더 큰 고통을 받게 돼. 더 많은 지혜를 얻은 자가 적은 지혜를 얻은 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는게 오히려 당연하지. 악의로 죄를 지은 자들이 약함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진 자들보다 더 큰 고통을 받게 돼. 어쨌든 누구든 자신이 받을 만큼의 고통을 받지. 오 현실이 아니었으면, 이곳이 싫은 이유는 훨씬 더 많아!
네가 언젠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지. 이는 어떤 성인이 말했다고 했지. 그때는 웃고 넘겼지만, 그 말은 나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었어. 이게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죽기 전에 회개할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난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 말은 사실이야. 내가 갑자기 죽기 전까지는 지옥이 어떤지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었어. 지옥에 가고 싶은 인간은 없어. 하지만 나는 지옥을 생각하지 않고 죽었고, 이 때문에 하느님을 배신한 채 죽었으며, 앞으로 그 결과 때문에 고통받게 될 거야.
이미 말했듯이, 나는 나의 길을 바꾸지 않았고,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더 신중하고 규칙적인 행동을 하듯이 습관처럼 똑같은 길만 고집했어.
이제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할게.
일주일 전 – 너희 시간 단위로 얘기할게. 내가 참아낸 고통을 생각하면, 10년은 지옥불에 타고 있는 것 같아. – 지난주 일요일 남편과 나는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어. 이게 나의 마지막이야.
그날은 따스하고 아름다운 날이었어. 오랜만에 기분이 좋고 편안했어. 그러다 운전 중에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어.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나는 예기치 않게 반대 방향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자동차의 불빛에 눈앞이 깜깜해졌지. 남편은 자동차를 더 이상 통제하지 못했어.
“지저스!” 나는 소리쳤어. 기도한게 아니야, 비명을 지른거지. 뼈가 부서지는 통증을 느꼈어. 이 고통도 지금 겪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그때 의식을 잃었어. 오 세상에! 그 날 아침에 ‘다시 미사에 나갈까’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었어. 그건 마치 내 마음이 외치는 애원 같았어.
하지만 그때 나는 강하고 단호하게 “안돼” 라고 싹을 잘라버렸지. 나는 이런 생각을 잘라냈어.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모두 내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책임을 지고 있지.
내가 죽은 후의 일들은 너도 잘 알거야. 남편과 어머니가 나를 묻으며 너무 슬퍼한 것도 알고 있어. 너는 이 모든 것을 마지막 세부적인 것까지 알 수 있을거야. 마치 우리가 지금 느끼는 본능적인 직관처럼 말야. 우리는 세상의 일을 지엽적으로 알 수 있지만, 우리가 관심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있어. 그래서 네가 있는 곳도 알 수 있었어. (14)
(14) “따라서 지옥에 잇는 자들은 지금껏 그들을 슬프게 했던 이유들을 집중적으로 찾으려 할 것이다. 결코 즐거웠던 이유들을 찾진 않을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98권 a.7.
죽음의 순간 나는 칠흑 같은 암흑에서 깨어났어. 갑자기 내 주위가 빛이 하나도 없는 어둠 속에 갇혔어. 그 장소는 내 육신이 누워있던 곳이야. 정말 극장 같았어. 빛이 꺼지고, 요란스레 커튼이 올려지고, 처연하게 빛나는 무대가 나타나는 것처럼. 내 인생의 장면이었어.
나는 거울을 마주하듯 내 영혼을 보았어. 은총을 보았어. 젊은 시절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마지막으로 ‘싫다’고 하며 내가 발밑에 짓밟았던 그 은총을 봤어. 나는 마치 죽은 희생자 앞에서 재판을 받는 암살자가 된 기분이었어. 후회했냐고? 절대로! 내가 내 행위를 부끄러워 했을까? 절대로! (15)
(15) “악인들은 자신의 죄를 직접 (즉 죄에 대한 증오로) 회개하지는 않는다. 아직 죄의 마음이 저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들은 죄에 대한 징벌로 고통받게 될 것이므로 간접적으로 회개하게 된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98권 a.2.
어찌됐던 내가 부정하고 거부했기에 하느님 존재 앞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였어. 달아나는 것. 아벨의 시체에서 멀리 달아나려 했던 카인처럼, 나는 이 끔찍한 곳에서 멀리 달아나려 했어.
그건 나를 위한 재판이었어. 보이지 않는 재판관이 말했지: “나에게서 떠나라!” 그러자 내 영혼은 마치 번개의 찌꺼기처럼 빠르게 영원한 고통의 장소로 떨어졌어! (16)
(16) 지옥은 분명히 존재한다. 허나 이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옥의 형벌이 영원하다는 것은 교리로 가르쳐진다. 하지만 그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명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 마태오 25:41, 46 그리고 테살로니카 1:9, 유다서 1:13, 묵시록 14:11, 20:10 의 말씀에도 지옥의 구절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반박할 수 없는 말씀이다. 더불어 ‘영원한’이라는 단어를 ‘오랜 시간’정도로 해석하여서도 안된다. 만약 이 교리를 설명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면, 예수님께서도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를 드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지옥은 존재하며, 그곳에 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려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이 서간의 목적도 주님의 비유처럼 단순히 감정을 자극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소책자의 목적은 다음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지옥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죽어서 그곳에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클레어의 마지막 말
이렇게 지옥에서 온 Anne의 편지가 끝났다. 마지막 부분은 글씨가 삐뚤어져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편지를 다 읽었을 때 편지는 재로 변했다.
내가 들은 것은 무엇일까? 처참한 상황을 상상하며 다 읽은 후, 내 귀에는 정말 현실의 달콤한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직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얼른 일어났다. 이른 새벽빛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삼종을 알리는 성장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꿈을 꾼건가? 이 꿈을 꾼 후 성모송을 했을 때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큰 위안을 느꼈다. 나는 성모송을 세 번 기도했다. 기도를 바치는 동안 문득 분명하게 드는 생각이 있다. 하나는 언제나 우리 주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가까이 있어야겠다는 것이며, 그리고 성모님의 자녀로서 성모님께 고통을 드리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주님을 절대로 보지 못할 영혼의 꿈을 꾼 이후라는 것이 조금은 이상했지만.
아직 간밤의 꿈에 대한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을 다스리려고, 나는 얼른 일어나 수도원의 성당으로 달려갔다. 내 심장은 그때까지 흥분하고 있었고 진정되지 않았다. 내 옆에 무릎 꿇고 있던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내가 계단을 급하게 오르내려서 숨이 차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처럼 허약하고 근시가 심하고 많이 아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는 열심인 고귀한 정신을 가졌던 부다페스트에서 온 친절한 부인은 오후에 정원에서 산책하다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주님께서는 그렇게 서두르며 섬기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나중에 부인은 내가 다른 이유 때문에 흥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요. 어떤 것에도 놀라지 마세요,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라고 한 성녀 데레사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그녀는 내 영혼을 읽듯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렇다. 나에게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하느님만 계시면 충분하다. 승리를 위해 아무리 많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나는 주님 곁에 머물 것이다. 나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육신의 시력을 잃는 것보다, 양심의 시력을 잃는 것이 더 나쁜 실명이다. 너무도 많은 자들이 실명하여 불로 뛰어들고 있다. 인간들이 지옥의 존재를 지우려 하지만, 이제 곧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지옥은 존재한다. 그리고 천국도 있다. 육신의 죄로 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보내지고 있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예수님 , 1970. 10. 2
위의 사진은 베이사이드에서 베로니카가 주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말씀을 받고 계신 중에 찍힌 지옥불 사진입니다. 예수님께서 묵주신공이나 기도할 때마다 지옥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지옥을 생각하면 범죄를 자제할 수 있기 때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성 미카엘회 송바울라
번역 : 성미카엘회 회장 송바울라
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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