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 세미나 (The Charismatic Movement)/①은총에 대한 혼란: 성령 세미나 운동에 대한 가톨릭의 비판

은총에 대한 혼란: 성령 세미나 운동에 대한 가톨릭의 비판...

성 미카엘회 회장 송 바울라 정자 2021. 11. 27. 21:04

These Last Days News - 2018. 11. 16

 

은총에 대한 혼란: 성령 세미나 운동에 대한 가톨릭의 비판...

 

 

“나의 딸아, 많은 이들이 성령을 찾아 부르지만, 저들이 부르는 것은 하늘과 빛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저 깊은 지옥 밑바닥에서 올라온 것들이다. 달아나거라! 너희는 이런 목적의 모임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저들은 빛에서 온 것이 아니다. 나의 자녀들아, 때가 되면 너희가 이 모임들이 일으키는 재앙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더 많이 아는 자들이 이 거짓 성령을 쫓아 악마의 모임에 자신을 바치고 있구나. 너희에게 이런 거짓 성령은 필요가 없다. 성체성사를 통해 성자는 언제나 너희에게 임하실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많은 이들이 거룩한 성사를 외면하고 ‘사랑, 사랑!’을 외치며 새로운 세상을 찾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누가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아느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느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세속의 사랑보다 진정한 사랑에 굶주림을 느끼겠느냐? 이 진정한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마저 바칠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4. 6. 15

 

 

 

OnePeterFive.com 2010. 10. 6일 기사:

 

Peter Kwasniewski 작성

 

머지않아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성령 세미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질문은 “쇄신”에 깊게 관여된 가톨릭 신자들에게서나 확고한 회의론자 사이에서 나올 것이다. 또 이것은 대중의 인기를 즐기는 마지막 시대의 몇몇 교황들이 널리 퍼진 몇몇 사회 현상을 이용하려는 단순한 욕망에서도 비롯될 수 있다.

 

매우 세속적인 가톨릭계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의 청소년기에 꺼져가던 나의 신앙은 더더욱 성령 운동을 하는 청소년 모임에 참석하여 2년의 세월을 보내는 허송 세월을 보낸 뒤 다시 깨어날 때까지 나의 신앙은 소멸된 것처럼 보였다. 그 모임의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열심이고, 활동적이며 친절하였지만, 과격한 음악과 즉흥적인 기도, 그리고 미사의 일부분은 불법의 경계를 오갔다. 처음부터 내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신앙을 더욱 깊이 연구하면서, 오히려 청소년을 위한 교리 교육이 점점 더 나의 마음을 채워주었다. Steubenville에서 열린 ‘빅 텐트’ 대회에 참여했을 때, 나는 감정과 메시지, 그리고 대중들의 발작적 히스테리 때문에 큰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이런 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이들의 선의를 조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기도, 전례, 음악에 대해 가톨릭 교리 어디에서 얻었는지 항상 궁금하였다.

 

루드빅 오트(Ludwig Ott)의 가톨릭 교리 기초, 마리아의 헌신,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에서의 교양 교육, 그레고리오 성가 합창하기, 그리고 마침내 전통적인 라틴 미사를 경험한 것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다. 진리에 대한 내적 탐구,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갈증을 풀어 준 종교 활동이었다. 나는 신앙의 기탁, 교부들과 교회 박사들의 지혜, 그리고 우리의 공통 기도, 신앙심, 전례 예술의 위대한 유산, 성신께서 나를 불러 귀중한 선물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가톨릭 신자로 인도되었다. 이것은 나를 더 큰 경이, 희생, 그리고 변화를 불러온 성신의 소중한 선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성령 세미나 운동은 나에게 기도하고 싶은 열망은 심어주었지만, 이들이 선호하는 기도는 모임의 활기에 의존하여 감정에 기대며, 겉모습만 요란한 기도였다. 하지만 내가 전통 전례의 미사에 참여하였을 때, 나는 그전까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기도의 바다를 발견하였고, 그 기도의 바다에서는 영원히 지치지도 않고 헤엄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이곳에서는 급작스런 변화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주님을 찾을 수 있었고, 당신의 언어(느리고, 온화하고, 평화로운)를 배울 수 있는 깊고, 울림이 있는 고요한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만만찮은 도전도 있었지만, 결코 위로가 부족하지는 않았다. 나는 라틴 교회의 2000년 역사에서 성인들의 호흡에 맞춰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미사 전례를 찾을 수 있었다. 여러 상징과 표시들- 제단에서의 많은 입맞춤, 무릎을 꿇는 인사, 동양식의 허리 굽히는 인사, 십자 성호, 기품있는 의복들과 그릇들, 성가와 향 등 이 모든 것이 내 영혼에 닿아 “장애가 되는 모든 오만을 쳐부수며 어떠한 계략이든지 다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킨다.” (2고린도 10:5)

 

나는 이 모든 것은 몇 년 전 전통 전례 미사를 집전하던 한 신부님이 오순절 후 10번째 주일 미사에서 설교한 고린도 1 12장 2~11절에 있는 말씀을 기반으로 한 강론을 소개하고자 한다. (덧붙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급속히 번지는 성신 강림 운동으로 오히려 초기 교회부터 사용해온 ‘오순절 후 ~ 주일’이라는 연례 주기를 폐지한 것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성신의 강림을 상기시키는 이 연례 주기는 평시 주일로 대체되었다) 내가 이 신부님을 만나 성령 세미나 운동에 대한 주제로 많은 논의를 할 때 신부님은 이 강론을 나와 공유하였으며, 나는 익명으로 이 강론의 내용을 출판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성신의 강림이나 영적 은총에 대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하여 우리는 그들을 존중하지만 예리한 비판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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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의 강림에 대하여

 

어느 가톨릭 신부

 

지난 50~60년 동안, 우리는 성령 세미나라고 불리는 모임이 급증하는 것을 목격해왔다. 이 모임은 개신교에서 시작되어 번졌지만, 유감스럽게도 가톨릭교회의 틈새도 파고들어 점점 그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다. 이 모임이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보통은 군중들을 흥분시키는 역동적인 연설자나 패널이 있고, 학교 응원단과 같은 음악과 율동이 있는 소위 ‘찬양과 예배’가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소위 방언, 예언, 병자의 치유 등의 형태로 성령의 발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가톨릭 단체들은 이러한 이단의 것들을 미사나 성체 조배 속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더욱 발전되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위대한 성인들과 교부들이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해 가르치고, 수 세기 동안 교회의 칙령과 율법으로 승인된 교회의 영적, 전통적 전례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다. 이들 전례의 형태는 감정에 큰 비중을 둔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어떤 것에서도 선을 끌어내실 수 있으시며 언제나 그렇게 하시지만, 이러한 형태가 영적 삶과 그 발전을 감정적 경험으로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영적 삶의 목표가 사랑의 의지와 완전함에서 벗어나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에게 맞춰진다는 것이다.

 

오늘 고린도서에 의한 독서의 내용은 고린도의 새로운 신자들이 성 바오로에게 성신이 주시는 은총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기에 성 바오로께서 쓰신 편지이다. 이 의문이 고린도 교회 전체에 번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신자들 사이에서 성신의 선물인 은총을 비교하고 분류하는 이상한 습관이 생겨 서로 시기하고 다툼이 잦아졌다.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성 바오로는 모든 은총은 하나의 근원, 즉 성신이자 진리의 성신이라는 하나의 원천에서 비롯되었으므로 내가 더 낫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 가르치신다. 그런 다음 성 바오로께서는 방언의 능력, 언어의 해석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병 고치는 능력 등과 같은 아홉 가지 다른 은총을 열거한다. 초기 교회에서는 고린도에서 보듯 이런 은총의 존재가 흔하게 목격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지역에서 사도들을 통해 교회의 가르침이 전파되고 확인되는 데에 도움을 주려는 성신의 활동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은 성신이 주신 은총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사도행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은총으로 성 베드로는 오순절에 3000명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다. 이 은총은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가질 수 있지만, 교회가 커지고 카톨릭이 온 세상으로 전파되어 뿌리를 내리면서 이러한 은총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점점 잊혀져 갔다. 이 은총은 비오 신부의 예처럼 대중이 모두 인지하는 사례부터 대부분을 차지하는 개인의 사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목격되고 있다. 하지만 대중이 모두 인지하는 공적인 은총의 경우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다.

 

첫째 오늘날의 성령 세미나 운동은 개신교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는 합당한 영적 권위가 애초에 없는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교회가 심사하고 결정하여야 할 성신의 선물인 은총의 존재와 장소, 그 능력에 대해 오해와 맹목적 믿음이 발생한다. 우리는 자신을 빛의 천사인 것처럼 가장하고 다가오는 지옥의 대리자들에게 얼마나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는지 항상 명심하여야 한다. 불행히도 이미 가톨릭교회는 이들의 속임에 넘어간 것으로 보이며, 최근 거룩함의 진정한 의미의 붕괴와 함께 이러한 은총의 선물과 목적에 대해 많은 혼란이 생겼다. 깨어있지 않으면 이 혼란은 우리 영혼의 파멸이나 영혼의 성장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많은 개신교회는 성령의 은총 중 하나를 소유하는 것은 거룩함이나 신의 인정을 드러내는 표식으로 여기며, 이러한 사상이 광범위하지는 않지만,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도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 이 사상은 진리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위대한 성인들의 저서와 교부들과 신학자들의 저술에서 보이는 성신의 선물인 은총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이러한 은총이 “특별한 은총”, 즉 이 은총은 받은 사람의 거룩함이 아닌 다른 영혼의 거룩함을 위해 사용하라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라는 것이다. 이 선물은 거룩하게 하는 은총과는 구별된다. 이미 알듯이 거룩하게 하는 은총(또는 사랑)을 받은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 이는 영혼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심을 뜻하기에 이 은총을 몰아낼 대죄를 범하지 않는 한 언제나 영혼 속에 함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은총은 일반적인 것이며, 모든 영혼에게 개인의 거룩함과 구원의 목적을 가지고 퍼져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이 은총이 반드시 필요하며, 회개와 선행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이 은총은 자라날 것이다. 이처럼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성령 세미나가 보는 은총은 큰 차이가 있으며, 이는 매우 중요하다: 은총은 우리 자신의 거룩함을 위한 것이고, 성신의 선물인 은총은 다른 이들의 거룩함을 위한 것이다. (성신의 선물인 은총과 일반적인 은총을 구별하였다) 그러므로 개별적 개인의 거룩함이 성신의 선물인 은총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아니며, 개인이 대죄를 범한 상태에 있더라도 여전히 성신의 선물인 은총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대죄를 범한 상태의 사제라도 고백성사를 듣는 동안에는 고백하는 자의 영혼을 설득하는 성신의 은총을 선물받아 그가 잊었거나 부끄러워 숨기는 죄를 밝히도록 할 수 있다. 이 경우 성신의 은총은 사제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오히려 참회자가 불완전한 고백을 하거나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이 예를 보듯 성신이 주시는 은총은 본인에게는 큰 의미가 없으며,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한 목적에 매여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이 사용할 선물을 주실 때, 그 선물은 단 한 번 사용하거나, 간헐적으로 사용되거나, 이상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은총을 결코 원하거나 달라고 기도하여서 얻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비오 신부께 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을 겸손하게 이끄시고 그것이 전적으로 그의 소명임을 증명하기 위해 언제나 고난을 주어 많은 고통을 겪게 하신다. 사실 이 고난이 그 선물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징표일 것이다.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누군가 성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광고하는 것은 매우 의심스런 행동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행동으로 다른 이들이 구원의 희망을 하느님이 아닌 은총이나 사람에게서 구하려 할 것이고, 이는 은총을 주신 목적과는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신의 선물의 합당한 자리와 기능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소위 성령 세미나의 목적과 왜 우리가 이들을 가톨릭교회에서 보게 되는지에 대해 정당하게 의문을 제기할 근거가 된다. 이곳에 성령 세미나에 관련된 자들의 선한 의지를 비난할 사람은 없다. 앞서 말했듯이 이들의 예식은 감정에 엄청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의 감정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할 수 없으면, 그 감정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내세워 우리의 이성을 지배한다. 영적인 삶의 본질은 우리와 하느님의 뜻이 일치하는 데 있으며, 그러한 일치에 이르는 길은 종종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본질적으로 십자가의 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힘들어하는 영혼에게 합당한 위로와 주님께서 직접 임하셔서 큰 위로를 주신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영혼을 돕고 격려하신다. 우리는 이런 감상적인 감정들에 끌린다. 영혼이 영적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이러한 위안이 더 많이 필요하지만, 영혼이 성장할수록 하느님께서는 위안의 빈도를 줄이고 주님의 선물을 사용하여 더욱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영혼의 결의를 시험하시고, 주님을 훨씬 기쁘게 할 사랑을 베풀 기회를 더 많이 주실 것이다. 결국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안에서 떼어놓을 것이다. 이는 거룩한 영적 삶을 살아오신 모든 성인의 가르침이다. 특히나 카르멜 수도회의 성인들; 예수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하지만 불행히도 많은 영혼은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처음의 열정도 사라질 무렵 위안마저 사라지면 놀라 주저앉는다. 더욱 높은 성장으로 가는 바르고 좁은 길을 예속 이어가면서, 하느님께서 왜 나를 버리셨을까를 염려하는 대신에, 한때나마 맛본 하느님의 위안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기 위해 감상적인 감정에 눈을 돌릴 수 있다. 사실, 어떠한 기대(그리고 이는 매우 미묘할 수 있다)는 신을 숭배하는 목적이자 기능이라는 점이다. 요즈음 얼마나 자주 미사 참여에서 개인적으로 확신을 느끼고, 자신에 대해 유익함을 느끼는가? 성령 세미나에서의 은총의 표현은 상당 부분 감성적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위안을 구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이는 한 무리가 주님께 표식을 구하려 했을 때 주님께서 표식만을 찾으려는 한심한 세대라고 나무라신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의 영적 삶에 대한 첫 번째 주의할 점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위안과 성장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이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영혼에 더욱 큰 이익을 얻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성신의 축복에 대해 항상 큰 주의를 기울여왔다. 일반적으로 성신의 은총은 종종 잘못된 곳에서 구하는 경우가 많고, 감정이 격하여 심리적인 광란의 산물이거나 악마로부터 받는 등 실제로 거짓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성령 세미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다. 성신의 축복은 언제나 다른 영혼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하고, 이 방언의 축복이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이해한다면 이 축복의 은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성신의 축복을 받고 은총을 확인한 사도들이 다락방에서 나와 다양한 나라에서 온 군중들 앞에 서서 사도들은 신앙을 설파하였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각기 자기 나라의 언어로 알아들었다. 이는 듣는 이들의 이익을 위해 사도들은 비록 하나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교하였지만, 다른 이들이 자신이 이해 가능한 말로 들음으로써 구원에 필요한 신앙의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은총은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색을 말한 것도 아니었고, 그다음 주에 있을 전차대회 준결승전의 결과에 대해서 말한 것도 아니었다. 이 경우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방언의 은총은 자신이 전혀 모르는 다른 나라의 말로 말하는 방법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성인의 삶을 산 선교사들의 이야기에서 본 것처럼 신앙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그 언어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이런 이유로 방언을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성령 세미나와 같은 곳에서 하느님은 경배하거나 찬양한다는 주장으로 흔히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횡설수설의 형태는 절대로 아니다. 방언의 축복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말한다. 즉 그 말을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횡설수설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사실 외에도,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창조물들이 이성적이고 지적이며, 자발적인 예배를 바치는 것을 원하시기에 우리 인간들에게 지성과 의지를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횡설수설은 완전한 실패작이다. 둘째로 이 은총은 목적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 이 방언에 통역이라는 성신의 축복은 없다. 통역의 은총은 가르치는 내용이 올바른 방식으로 이해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해석의 은총은 이단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진리의 성신의 보호이다) 게다가, 우리는 악마는 모르는 언어를 말하도록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이러한 재능을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전해진다는 것을 항상 주의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축복은 항상 신앙의 가르침과 일치하여야 하며,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은총은 하느님이 주신 것도 아니며, 진리의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조사와 판단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그리고 이 성령 세미나의 확산과 관련한 교회 수뇌부의 침묵, 더 나쁘게는 이 성령 세미나를 은연중에 지지하는 처사로 얼마나 많은 영혼이 저들에게 이끌려 길을 잃고 있는지 생각하여야 한다.

 

성신의 축복을 대하는 가장 좋은 태도는 무관심이다. 이 은총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주요한 영혼의 거룩함에 대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사도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항상 더 높은 은총,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적 완전함이 만들어지는 사랑을 더욱 추구하여야 한다. 믿음과 소망, 사랑을 키우고, 세례받은 모든 사람에게 부어지는 성신의 은총과 축복을 간구하며 잘못된 길을 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들은 우리가 평생에 걸쳐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은총이며 양식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든 자녀들 중에 당신의 자녀로 입양하셨기에 우리에게도 일정한 “권리”는 있다.

 

성령 세미나와 관련하여 가장 좋은 것은 멀리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를 모범으로 따라야 한다. 겸손하고 정직하며 진실하며 하느님의 징표를 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만을 구하여야 한다. 우리가 지나치거나 못 볼 수도 있는 고요한 하느님의 속삭임에 우리를 이끄는 것은 성신이 우리 영혼 안에서 같이 계신다는 증거이며 우리는 기도를 통해 성신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쓸데없는 징조나 기적 속에서 위안을 찾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종종 인내할 힘을 그 조용한 속삭임에서 찾을 수 있다. 또 우리는 성신의 조용한 속삭임에서 주님의 가장 위대한 은총, 즉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에 매달리도록 했고, 우리 모두를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 영혼에 생명의 불을 지르게 한 주님의 가장 큰 은총의 선물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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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잘못에 빠져있구나. 성자는 당신의 집, 교회에서 너희 구원을 위해 간결하고 직접적인 계획을 너희에게 주었다. 온갖 새로운 것과 변화를 당장 멈추어라. 더러운 것과 타협해서는 영혼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성령을 부르짖는 자들아, 암흑의 왕자가 너희에게 암흑의 영을 보내라 명령하고 있구나.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천사조차 가기 두려워하는 곳의 땅을 밟고 있다. 너희는 성신에게 오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성신은 전능하신 성부의 뜻대로 전해지는 선물이다. 이제 당장 너희는 어둠의 지역에서 방황하는 것을 멈추거라.”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6. 6. 18

 

 

 

 

번역: 성미카엘회 회장 송 바울라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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