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거짓 순명은 교회에 실제로 해를 끼칩니다. 해결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다
"너희는 잘못된 것에 순명하지 말아라. 그렇게 되면 너희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될 것이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1. 9. 7
"영원한 도시 로마가 큰 화재에 휘말릴 것이다. 규율이 회복되어야 한다. 순종, 그렇다. 하지만 인간의 관습이 아닌 너희의 신에 대한 진정한 순종이어야 한다. 많은 죄악이 순종을 가장하여 교회 안으로 침입하였다. 나의 자녀들아, 우리는 이것을 오류와 사탄주의에 가려진 거짓된 순종이라고 부른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예수님, 1976. 8. 21
거짓 순명
"하느님께서는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너희도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 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언제나 변하여야 한다. 그리고 순명: 하느님을 불쾌하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순명은 거짓 순명이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82. 6. 18
LifeSiteNews.com, 2024. 1. 2 기사:
J. M. Goretti 신부 작성
다음은 본당 신부가 쓴 순명에 관한 연작물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Part II: 거짓된 순명과 존중이 초래한 해악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겠나요? 여러분의 마음이 꽉 닫힌 것은 아닌가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십니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십니까? 그리고 기억하지도 못하시나요?
거짓 순명과 참 순명의 주요 차이점은 거짓 순명은 진리를 희생하는 반면, 참 순명은 진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거짓 순명은 주로 두 가지 면에서 진리를 희생시킵니다. 점진적으로(1부 참조) 그리고 모호함으로 인해 진실의 은폐를 허용합니다. 영화 악마 네파리우스(Nefarious the demon)에서 악마는 그들을 사로잡을 때까지 죄를 지은 인간 희생자들을 점차적으로, 눈에 띄지 않게 더 깊은 불순명으로 몰아넣는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빙의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더 위험한 형태의 죄악의 노예 상태입니다.
우리는 왜 진실을 희생합니까? 이것은 다양한 이유로 행해집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함이거나 바티칸이 제공하는 온갖 혜택을 잃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실제로 속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제는 주교가 말하는 것이 무엇이든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따릅니다. 그런 순명에는 장점은 전혀 없고 부주의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무원칙한 행동이며 그 사람은 신학적 이정표입니다. 거짓 순명은 우리의 믿음을 점진적으로 파괴하고 배도와 부도덕이라는 끓는 물 솥에서 점점 높은 온도를 받아들이도록 조건을 만듭니다. 거짓 순명은 도덕적 미덕의 영완인 신중함의 부족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순종하거나 적어도 ‘존중’으로 침묵을 지키고 전복자들이 하느님께서는 이 거짓 희생을 기뻐하고 늑대와 세상의 개종처럼 바오로의 은혜로 그것을 축복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계속해서 훼손하도록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경솔하거나 추악한 공모를 축복하지 않습니다.
거짓 순명은 또한 잘못 인도되고 복음화되지 않은 가톨릭 교회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파티마에서 성모님께서는 “아무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영혼들이 지옥에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한심한 고위 성직자 계층에서 나오는 왜곡된 반복음에 대해 얼마나 더 지켜봐야 하나요? 우리는 왜 무대 뒤에서 악마들이 조직하는 대규모 허위 정보와 왜곡 캠페인을 용인하여야 하나요? 대제사장들 앞에 섰을 때 성 스테파노가 보여줬듯 왜 우리는 성신에 의지하지 않나요? 대제사장들은 유대교의 합법적인 구성성서의 권위자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나 누군가를 사랑할 때, 싸우지 않기 위해 경건한 듯한 변명을 만들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어머니나 아내, 아이들을 공격한다면, 그것에 대해 기도나 하고 금식이나 하겠습니까? “오, 그는 주교 복장을 하고 있으니 존경을 표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까? 교회 직분이 사기, 기만 및 무효화 의도에 의해 빼앗겼다는 사실은 시간이 지나도 일반적인 종속적 수용으로 치유되지 않습니다. 이는 기만, 무지, 순진함 또는 문제에 대한 무관심 때문입니다. 이단적이거나 사탄을 숭배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시간이 지나도 합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비슷한 예로, 소련은 왕위의 합법적 상속자인 로마노프 왕실을 몰살시키고 수백만의 시민을 살해했다는 이유만으로 합법화 되지 않았습니다. 낙태는 부도덕한 다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합법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 교회는 세상을 성화하는 도구이자 세상의 빛입니다. 침입자들이 그것을 빼앗아 교회의 원숭이(행동을 모방하는 생물)로 변형시키도록 두는 것은 그 이상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가 이제 한 가지 죄에 대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도 잘못되었지만, 사악한 교회 지도자들이 어린이와 무지한 사람들의 신앙을 해치도록 허용하는 것은 더욱 잘못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성추행에는 당연하게 혐오를 드러내지만, 영혼의 성추행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마태오 18:6) 포식자들을 도와주고 공모한 ‘주교’들은 결국 문제를 인정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그러나 타협한 로마가 아닌 죄를 이용하여 우리의 고통받는 교회를 비하하려는 반가톨릭 매체에 의해 그들이 강요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심각한 스캔들과 불명예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거룩한 능력을 진압하고, 성 스테파노가 사도행전에서 그들에게 비난한 대로 성신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사명을 방해하고 세상에 빛이 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전도 사명에 그들이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프랭크 파보네(Frank Pavone) 신부나 얀비에르 그베누(Janvier Gbénou) 신부, 또는 오래 전 엔리케 루에다(Enrique Rueda) 신부와 같은 유명한 선한 성직자들에게 취해진 악행을 볼 때, 그들이 생계를 걱정하는 성직자들에게 가하는 억압을 우리는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제와 다른 이들이 가한 자기 검열의 규모를 정말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세상은 빛을 잃었습니다. 이들 침입자들과 그들의 아첨꾼 협력자들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희망의 목격자”라고 말하고 희망했던 ‘새로운 봄”을 좌절시켰을지도 모릅니다.
지상의 교회는 세상을 위한 은총의 원천이기 때문에 교회가 어두워지면 세상은 은총을 잃게 됩니다. “많은 영혼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만약 우리가 거짓된 존경과 복종으로 인한 피해와 같은 다른 사항들에 대한 문제를 깨닫지 않는다면, 파티마 평화 계획을 따르지 않는 실패와 같은 문제들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더 많은 세계 전쟁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하고 정통적이며 활력이 넘치는 교회는 세계 평화를 위한 신성하고 인간적인 수단입니다. 다른 수단은 없습니다. 파티마의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전쟁은 죄악에 대한 벌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만약 최근 강론에서 교리가 왜곡되고 또 다른 신실한 사제나 주교에 대한 탄압이 일어나는 것을 그냥 참아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면 그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베르골리오가 소아성애 조장자이자 증인인 바로스(Barros) 주교의 임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중상주의자로 비방했을 때 칠레에서 했던 것처럼(물론 폭동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을 지지하지 않았고 “로마가 문제가 종결되었다고 말했다”거나 오직 신의 개입만이 교황을 다룰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비가노(Viganò) 대주교가 이 산헤드린 늑대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라고 촉구한 것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 조언이 비현실적인가요? 대주교는 현재 상황에서 주님의 성전을 정화하는 데에 행해져야 할 일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충분한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 모두도 어느 정도 죄인이지만 늑대는 권력에서 축출되어야 할 위험하고 용납할 수 없는 범주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내가 늑대에게서 도망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저들이 아니라 자신이 쫓겨날 것을 염려했습니다!
지금 늑대들은 말라키 마틴(Malachi Martin)이 지은 소설 ‘Windswept House’에서 언급된 성채를 점령했습니다. 이 늑대들은 신중하고 용기 있는 충실한 행동에 힘을 실어주는 기도와 단식에 의해서만 쫓겨날 수 있습니다. 그 늑대들은 목자가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 직분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직책에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신은 그 안에 있는 늑대를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마호니(Mahony) 추기경의 이단적인 성체에 관한 문서에 대해 안젤리카 수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교구에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법에 따르면 수녀의 발언은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교회법은 현실에 부합하고 심각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할 인간 존중과 죄악으로 가득 찬 ‘양치기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개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늑대의 노릇을 하는 아첨꾼들은 맹인들을 인도하고 있는데, 둘 다 지옥의 불구덩이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은 데오도르 맥캐릭(Theodore McCarrick) 같은 성적 매력의 포식자에게 줄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하늘이 주신 지혜를 가졌다면,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소중한 자녀들 주위에 가까이 두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릇된 존경심을 비판한다고 해서, 속은 자와 악인을 향한 어리석고 독선적이며 경멸적인 행동을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옥 길에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나요? 아니면 그들이 우리에게 초래하는 고통만을 이기적으로 경멸하는 것입니까? 자비로운 저항의 모델로 Jesusmary Missigbètò 신부의 배움을 담은 편지들을 잃어 보시기를 제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진실로 ‘독사의 자식’이라고 부르고 그들에게 반대하여야 합니다.
우리 각자를 위한 이 눈물의 골짜기가 끝나면 우리는 참 성덕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는 박해를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기로 선택한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와 금식뿐 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 이단적이고 공모적인 위계 문제가 우리에게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와 금식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밖의 일로 인해 불안해하거나 속상해서는 안 됩니다. 악마가 촉발한 이 불안은 더 큰 불안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더 악화되어 희망의 결핍, 비통함, 분노, 죄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시편 131:1 :
야훼여, 내 마음은 교만하지 않으며
내 눈 높은 데를 보지 않사옵니다.
나 거창한 길을 좇지 아니하고
주제넘게 놀라운 일을 꿈꾸지도 않사옵니다.
차라리 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
내 마음 평온합니다.
이사야서 30:15에서도 비슷한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마음을 돌려 진정하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다.
고요히 믿고 의지하는 것이 힘을 얻는 길이다.”
그런데 너희는 거절하였다.
여기에는 너무 많은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악마들이 그들에게 영감을 주고 인도하고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 감각이 성신의 인도로 선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처럼, 사탄의 자녀들을 인도하는 불신 감각도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취하든 기도와 금식에 기초하고 이에 기초하지 않으면 무익할 수 있습니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의 자리가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사제, 선교사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교회의 신비한 몸의 중심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가시적인 결과를 원하지만 종종 직접적인 대립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강력한 적을 마주했을 때 고려해야 할 사항입니다. 그들에게 달려들 수도 있지만, 그 전략이 과연 얼마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까요? 성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의 결혼 무효 선언에 대한 자신의 입장에 대해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지만 침묵하며 대항했습니다. 그는 헨리 8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헨리 8세의 간통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그가 죽음에 이르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만 가능했습니다.
기도와 금식의 영적인 효과는 종종 빵에 누룩을 넣듯이 숨겨져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덜 효과적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정말 그럴까요? 교회의 숙고적인 종교 전통은 이를 매우 효과적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는 단지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기도와 신실함의 역사에 힘을 얻은 행동을 믿었습니다! 믿음이 산을 움직입니다! 영광스러운 멕시코의 크리스테로스 운동이나 1차 십자군 전쟁을 생각해보십시오.
기적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 과연 합당한 방법일까요? 우리는 진정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를 기다립니다. 만일 그 소년이 그것들을 넘겨주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기도와 금식, 신중하면서도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적절한 행동의 판단은 다른 사람들과 다양한 형태의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유명한 가톨릭 철학자 요제프 시페르트(Josef Siefert) 교수는 최근 추기경들에게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했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에 있습니까?(예수님께서 모두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깨끗이 고쳐주었는데 감사 인사하러 돌아온 한 명을 뺀 나머지 아홉 명을 물으심) 진리를 증거해야 할 다른 9명의 학자와 평신도 신학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째서 그들은 시페라트 교수와 몇몇 다른 사람들을 혼자 있게 내버려 두나요? 사람마다 하느님이 무엇을 시키시는지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가노 대주교는 전통주의 신학교와 대학을 설립하고자 합니다. 아타나시우스 슈나이더 주교는 최신 교리서를 썼습니다. 조셉 스트릭랜드 주교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이 신앙을 가르칠 계획입니다. 가식적인 경건함은 무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만이나 속임수이며 진리를 증언하는 십자가 회피입니다.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일부 사람들은 진정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희생을 하는 것은 어렵지만 때로는 더욱 어렵습니다. 사람이 정말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면 경솔한 행동보다는 혼자 기도하고 금식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성 이냐시오는 우리에게 이런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기도하고 일하십시오.”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그대들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일하여라.” “우리가 일을 하였어도, 양식은 여전히 우리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아버지께 양식을 청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교회법 2834조)
성 베네딕토 또한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기도하고 일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참조
“교회의 신비체를 바라보았을 때 성 바오로가 묘사한 지체 중 그 어느 지체에도 나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더욱이 그 몸 전체 안에서 나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싶었습니다. 사랑은 나에게 부르심의 중심으로 비쳤습니다. 사실 교회는 다양한 구성원으로 구성된 몸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 몸 속에서 필수적이고 더 고귀한 회원이 결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교회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마음은 사랑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사랑이 교회 구성원들을 행동하게 만들었으며, 이 사랑이 꺼지면 사도들은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것이고, 순교자들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랑이 모든 부르심의 경계를 넘어서며, 모든 시간과 장소를 아우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마디로, 이 사랑은 영원합니다. 내 영혼 속에서 최고의 기쁨으로 거의 황홀해지며, 나는 외쳤습니다: “오 예수, 나의 사랑, 마침내 내 부르심을 찾았습니다. 나의 부름은 사랑입니다.” 확실히 나는 교회에서 내 자리를 찾았으며, 그 자리를 주신 것은 나의 하느님입니다. 교회의 마음 속에서, 나의 어머니, 나는 사랑이 되겠고, 그렇게 하여 내 욕망이 그 방향을 찾을 것입니다.”
"나는 나의 사제들 중에 동성애를 묵인하고 이를 허용하는 곳에 나의 사제권을 쓰는 자는 용서치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사제권이 파괴되고 있는 것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예수님, 1982. 6. 18
로마가 적 그리스도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너희 세상의 인간들은 하나의 세계 정부와 하나의 세계 종교를 만들려 성자를 치워버리고 있구나. 슬프구나, 내가 전부터 너희에게 울부짖으며 말하지 않았더냐. 지금 기도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666이 영원한 신의 도시 로마에 스며들 것이며, 로마를 자신의 무리로 채울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양심과 눈을 가로막고 있는 장막을 거두거라.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녕 모르겠느냐?
“나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의 자녀들아, 성자의 교회를 구할 것을 너희에게 지시한다. 너희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나의 자녀들아, 기도하여라. 너희는 사탄과 그의 무리들을 신뢰하지 말아라. 이 영들의 전쟁에서 다른 이가 너를 대신해줄 것이라 기대하지 말아라. 양심을 아는 나이가 된 모든 이들은 진리와 빛의 전달자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의 자녀들아, 옛 예언자들이 말하고 적은 그날이 바로 지금이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7. 12. 7
번역: 성미카엘회 회장 송 바울라 정자
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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