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교구 사제: 교회 지도자들은 두려움을 버리고 진정한 신앙을 위해 일어서야 합니다...
"너희의 창조주로서, 곧 너희의 하느님으로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집을 되돌려 놓지 않는다면 내가 내려와서 단단한 나의 손으로 나의 교회를 되돌려 놓을 것이다! 목자들아, 너희가 내 앞에 서서도 너희의 가르침이 순수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내가 너를 데려가서 영원한 저주의 불 속으로 침을 뱉듯 너희를 뱉어 버리리라! 꽃 속에서 기어 나온 해충들아!”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예수님, 1976. 12. 28
문이 활짝 열렸다
"오 나의 자녀들아, 다시 한 번 말한다. 너희 시대의 징조를 알아채야 한다. 너희가 재빨리 스스로를 노예로 팔아버리고 있구나. 너희 나라와 세상의 많은 나라들의 정부는 지금 지옥의 대리인들에게 완전히 통제되고 있다. 666의 무리들이 너희의 정부뿐 아니라, 너희 목자, 너희 성직자들, 너희 주교들 사이에 뿌리를 내렸다; 심지어 사탄은 로마의 가장 높은 성직자들 사이에 들어갔다.
"나의 자녀들아, 바티칸 제2 공의회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되었지만, 온갖 종류의 이단자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젖혀서 서서히 신앙을 오염시켰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의 목자들을 깊은 잠에서 깨워야 한다! 그들이 새로운 인간의 종교에 자신을 맡기고 있구나."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7. 7. 25
J. M. Goretti 신부 작성
다음은 한 교구의 사제가 쓴 순종에 관한 시리즈 중 세 번째 부분입니다.
사목적 신중함 대 신앙
교회의 일부에서는 거짓 교도권에 대한 ‘저항’을 주장하는데, 이는 정통 교도권에 대한 참되고 거룩한 순종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1] 이 저항은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며, 이 저항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과거에는 이런 까다로운 질문에 대한 답이 불분명하거나 불충분해 보였던 경우가 많았지만, 선의의 실수를 하더라도 노력해야 했습니다. 나는 아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 사제들이 고심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불행하게도 기본적으로 정통파 성직자들도 ‘직업 안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땅히 저항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두려움이 정당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왕국을 먼저 구하면 하느님께서 공중의 새와 들판의 백합을 돌보시듯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리라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흔들린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신뢰하라고 가르칠 수 있습니까? 최근 치명적인 코로나19라는 기만 기간 동안 심하게 고통을 겪어야 했던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의 영웅적인 사례를 우리는 보았습니다. 지금의 우리도 그들의 영웅적인 모범을 따를 수 있을까요?
수십 년 동안 양심적인 사제들은 사목에서 내쫓기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의문을 품어왔습니다. 즉, 어떤 사목 활동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반쪽짜리 사목이라도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입니다. 즉, 침투자들이나 그들의 고용된 협력자들에 의해 내쫓기고 세속적인 직업을 찾아야 하며 사목 활동이 거의 없는 상태가 되는 것보다는 어떤 사목활동이라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한 평신도가 우리 사제들이 교회의 나쁜 지도자에 맞서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심각한 문제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그 평신도에게 자신의 교회의 훌륭한 사제들이 파면되고 아첨꾼이 자신의 선한 교회에 들어와 강론하는 것을 지켜 볼 준비가 되었는지 되물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격렬한 도덕적 주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강론을 피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혹은 그들을 극도로 회개해야 할 가톨릭 신자들의 공동체를 깨지 않을 정도의 약한 방식으로 그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타협의 자세로 중국의 ‘애국적 교회’에 가입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 불공정한 타협으로 얼마나 많은 손상이 발생하는지요?
믿음이 약하거나 자질이 낮거나 그보다 더 나쁜 주교들을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신중함의 부족으로 인해 해고당하지 않는 데에는 어느 정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마이클 로즈(Michael Rose)의 2002년 책 ‘Goodbye, Good Men’에서는 통제관들의 스크리닝을 통해 걸러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지혜가 있었습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생들, 그리고 사제들이 통제관들의 악에 용감하게 맞서지 않고 진실을 숨기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는 자신이 믿는 진리를 숨기고 계속 감추기 위해 파블로프의 개처럼 우리 자신을 철저히 조건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의 신앙과 경건함을 부패시키는 행위 입니다. 우리는 신학생으로서 숨기도록 조건 지어졌습니다. 우리는 선하고 작은 부제로서 가려져 언젠가 더 많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는 사제를 염두에 두기에 작은 파문도 일으키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제로 올라간다 하더라도 이런 논란으로 다시 강등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계속 타협하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는 우리가 ‘방향을 바꾸면’ 우리에게 되돌아 올 선례를 설정했다는 것을 잊곤 합니다. 오래 전 제가 처음 사제에 올랐을 때 저는 주교의 측근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선례를 세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들은 너를 매달 것이다”고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최선을 다했나요? 또 이런 ‘신중한 판단’ 뒤에 신앙의 결여와 과도한 두려움이 가려져 있는지 분별하여야 합니다. 더 많은 사제와 주교들이 이 해로운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맞서 초기부터 협력(비굴하고 부덕한 복종)을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5] “이런 것들은 처음부터 제거”하는 것이 훨씬 더 쉽지 않았을까요?
말라키 마틴(Malachi Martin)[6]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서가 공포되기 직전에 두 명의 추기경이 교황 바오로 6세를 찾아가서 새로운 미사 전례인 노부스 오르도(Novus Ordo) 전례 중 몇 가지 사항을 정정하지 않으면 즉시 교황을 이단자로 비난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때 교황청은 통상적인 보편적(무오류) 교리에 따라 일부 사제와 주교들이 거부한다 하더라도 도덕적 악이 내재된 이 공의회 문서를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교회 가르침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주교와 사제에 대해서도 어떤 징계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의 많은 사례 중 하나로 오보일(O’Boyle) 추기경이 회칙 Humanae Vitae를 공개적으로 반대한 19명의 사제를 징계한 ‘워싱턴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보일 추기경은 이 징계를 거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8] 교황 전기 작가인 조지 와이겔(George Weigel)에 의하면:
“1968년 휴전은 권위 있는 가르침에 반대하는 신학자, 사제, 기타 다양한 교회 전문가들에 대한 교육이 진행되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큰 비용이 들지 않았습니다.”
1968년의 휴전은 권위 있는 가톨릭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려는 성향의 주교들에게 논쟁이 뒤따를 가능성이 있다면 강행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여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분열을 두려워한 로마는 반대 의견을 피력하는 공개 행동에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그 결과 나는 ‘Courage’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가톨릭 주교의 세대는 자신을 권위 있는 교사이기 보다는 모든 사람을 대화에 참여시키고 행동에 참여시키는 일차적인 책임을 맡은 대화의 중재자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언급했듯이 교회의 평신도들은 ‘교리, 도덕, 사제직, 주교직 등 교회의 거의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Cafeteria Catholicism(교회내의 특정 교리나 도덕적 가르침을 선택적으로 따르는 개념)을 향한 충동은 1968년 휴전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만약 주교들과 교황청이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방어하지 않는다면, 교리와 도덕적 가능성이 가득한 슈퍼마켓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게 고르고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칭찬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에는 이를 성숙의 과정이라고 자주 언급되었습니다.[9]
두 번째 상황의 사례 중 많이 거론되는 것은 1968년 캐나다 주교들의 악명높은 위니펙 성명을 들 수 있습니다.[10] 캐나다의 주교들은 성명에서 본질적으로 부부들에게 양심이 편안하다면 내재적 죄악도 실행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교황청이 불필요한 역효과를 낳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인내하는 것이 일상화됐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태도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 보다 합리적인 토론, 연구 및 식별을 가능하게 합니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그 논의의 자리는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완고하고, 마음이 꽉 막히고 불성실한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대화는 참담하고 추잡한 정책입니다.
이런 문제의 싹을 애초에 잘라내지 못해 이제는 큰 참나무로 자라 버렸습니다. 세인트 갈렌 마피아(St. Gallen mafia, 유다 고위 성직자와 개종자들의 네트워크)[11]는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았으며 우리의 침묵, 항복 및 타협을 그들의 의제에 대한 지지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일부 의견 중에는 오직 주님의 개입만이 고위 성직계에서 그들을 뿌리 뽑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대립을 피할수록 더 악화된다는 것입니다. 쫓겨난 몇몇 훌륭한 사제들은 특히 그들을 도와줄 가족이 없을 때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위선적인 성직자들은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슬프게도 겉으로는 (진심으로 경솔한 판단으로) 그들의 증언을 의심했습니다. 그들은 “나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을거야”, “그 사람은 신중하지 않았어”, “그 사람은 주교님에게 순종하지 않았어” 또는 “우리는 전말을 알지 못해요”와 같은 말을 하면서 그 싸움에서 멀찍이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전체 이야기를 알 수 있을까요? 나는 때때로 이런 거리두기가 정당화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부 사제들은 주교의 환심을 사려고 선한 사제들을 박해하는 일에 가담할 정도로 비열합니다. 나는 우리의 구원사업을 이루려는 가톨릭 신앙에 대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신중한 태도로 대중에게 증언하려는 성직자들을 탄압함으로써 그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주교들의 행동을 오랫동안 경멸해 왔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완벽한 대응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통 성직자 집단의 의견을 미리 얻었다면 다른 의견을 얻었을 수도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들 탄압에 앞장 선 주교들은 복음에 대해서도 거짓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위선자들은 인간 생명, 생명의 복음, 동성애자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려는 제안에 관한 고려 사항과 같은 교회 가르침에 의해 부정되고 거부된 제안에 대해 어떤 증언을 하는지 절대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을 것입니다.[12] 그들은 박해를 주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그것이 진짜 죄악인 것처럼 하여 논쟁을 피해갑니다. 그들은 단순히 가톨릭 신앙과 도덕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언젠가 현명한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정상적인 결혼을 통한 성생활과 가족의 행복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설교했으며, 그 계획이 피임 등으로 방해받는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당신이 비난을 받고 있다면, 당신은 목표를 정확히 향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급여를 받는 사람들은 종종 믿지 않는 교인들의 악성 불만에 응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부 교인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찔리게 하는 도덕적 문제를 피하도록 하는 대가로, 이를 유리하게 하거나 가혹한 수단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신도들은 주교들과 사제들을 팔아 넘긴 것에 대해 중대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 (마태오 23: 26-28) 결국 위선은 삶의 한 방식으로서 믿음과 도덕의 손실로 이어집니다.(모든 종류의 불결함을 의미합니다) 기꺼이 순교자의 삶을 살 수 있는 사제와 주교들이 필요하므로 그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많은 성인들과 수도회에서는 영혼 구원을 위한 자신의 중요한 역할을 깨닫고 있는 사제들을 위해 평생을 기도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성인들과의 만찬을 위해 우리는 서로의 기도와 희생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진리의 사역에 있어서 자비롭고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를 꺽지 말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오 12:20 참조) 우리는 선의를 갖고 있는 잃어버린 양을 겁줘서는 안 됩니다. 성 바오로는 어린 영혼들을 양육하기 위해 젖을 주는 것에 말한 적 있습니다. 우리는 “메시아 콤플렉스”를 가져서는 안 되며, 반대로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열정이 없어서도 안 됩니다. Ad Majorem Dei Gloriam! (더 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신의 열두 열매는 우리 삶에서 분명히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 구원의 진리, 전체 진리를 시기와 무시(적절한 때와 부적절한 때)와 상관없이 말할 것입니까? 임종 때 할 것입니까? 우리는 또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증언으로 ‘먼지를 털어내는’ 것이 적절한지 알아야 합니다. 선한 제사장의 복음 증거를 거부하는 도시보다는 소돔과 고모라가 더 나을 것입니다.[14] 성 바오로는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당신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니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저는 이 신중함의 문제를 고민하다가 세례자 성 요한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요단강 아래에서 매우 성공적인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는 헤로데의 간음을 들어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그의 정통성을 파괴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직자들이 성 요한이 경솔했으며 헤로데를 자신의 죄에게서 벗어나게 하여 더 많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세례자 성 요한은 회개하는 것이 더 쉬웠을 다른 죄인들에게 집중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세례자 성 요한이 헤로데와 형제의 부인이었던 헤로디아, 그리고 그녀의 사악한 딸에게 도발하지 않았다면 추가적인 살인을 짓지 않았을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보세요, 그건 요한의 잘못입니다! 그는 선동가였습니다! 그는 공동체 속에서 행동했어야 했으며, 지역 랍비의 현명한 의견을 확인했어야 했습니다! 나는 오늘날 소위 주교라고 불리는 많은 이들이 성 요한은 목자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모호하고 끝이 없는 그리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강론을 했습니다. 그는 목회적인 자비를 위한 훌륭한 가식을 보였으며, 공교롭게도 성 바오로가 겪은 것과 같은 박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최고 법원인 산헤드린은 간통죄에 대해 매우 엄격했습니다. 그들은 간통 현장에서 잡힌 여성을 예수께서 어떻게 심판하는지 시험하려고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우리는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공공연히 간통죄를 지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에 대한 그들의 종교적 열성은 어디 있었습니까?
여러분이 궁금해하는 것처럼, 보통은 정통한 것처럼 보이는 여러분의 사제가 무언가 부족한 것 같다면, 철학과 신학 학위만으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지에 대한 불안감을 알아차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들과 지도자들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다지 정통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 하느님,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시편, 23:4)
저는 이렇게 주장하겠습니다. 현재 타락한 교황 아래에서 복종을 특별히 강조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과거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진정한 교리를 무시하고 약화시키며 경멸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저들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했습니다.[17] 현재도 그들은 교회의 신성한 전통에 대해 진정한 순종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이 신뢰를 잃은 인물과 어둠의 행위에 복종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조롱입니다! 그들은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 아래에서 카멜레온처럼 변화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위선자들입니다. 그들을 조종하는 자들은 가톨릭 교회와 교회의 교리를 새로운 세상의 교회적이지 않은 질서의 정부 통제 분야로 변화시키고, ‘인도주의’ 원칙에 헌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은 피투성이 프랑스 혁명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Carlo Maria Viganò) 대주교는 이에 대해 예언적으로 경고했으며, 그의 노고는 진정한 육체적, 영적인 자비의 업적입니다.
하느님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가?
사람들은 종종 “하느님은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가?”라고 묻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너희(우리 모두)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가?”라는 대답을 하셨다고 믿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헐벗은 자를 입히시고, 아이를 구원하시는 등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이 아름답고 변화하는 은총에 책임이 있습니다. 이 진리는 마태오 25장에 분명하게 밝혀졌습니다. 25장에는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태만 때문에 벌어진 죄악의 결과에 대해 하느님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염소들이 기도하지 않아서 단죄받은 것이 아니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죄 받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직자들이 이런 문제를 판단할 때 이냐시오식 명상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저항하지 않는 이유를 고려해보고, 하늘의 여왕 마리아가 우리 곁에 서 있는 것을 상상하며, 거짓 복종, 거짓 자비, 그리고 ‘빵 반쪽’을 아끼려다 잃어버린 모든 영혼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순수한 사랑의 힘으로 모든 것을 잃은 채 고통을 겪는 하늘의 형제자매들, 다양한 홍백 순교자들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18] 그런 다음 그들의 빛나는 존재 속에서 그들의 지도를 구하면서 결정을 내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주 예수님은 사도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세 번이나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흔들리고 겁에 질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까지 했습니다. 생활 속에서 주님이 허용하시는 시험들이 우리의 믿음을 미약하게라도 흔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그분의 변형된 하느님의 성전, 거룩한 사도 교회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악을 허용하시고 그로부터 선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교회법 311-312 참조)
이 고통스러운 시기에 위안이 되는 생각은 우리 각자에게 사명이 있고 이 시대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음은 1848년 3월 7일에 발표된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의 ‘Hopeful meditation’(희망의 명상)입니다.
1. 하느님은 스스로 완전하시고 복되시지만, 당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며 모든 일을 스스로 해낼 수 있었지만, 그분은 창조된 존재들을 통해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로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나 또한 다른 이들이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내가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사람들에게 멸시당하든 존경 받든, 하느님은 나를 알고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2. 하느님은 나를 특정한 봉사를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은 일을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나에게는 나만의 사명이 있습니다. 지상의 삶에서는 알 수 없겠지만, 하늘의 삶에서는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하느님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존재입니다. 내 위치에서 나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마치 대천사가 그의 위치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듯이 말입니다.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존재를 만드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돌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들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큰 사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사슬의 연결고리이자, 사람들 사이의 연결고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헛되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선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하며, 나의 사명을 지키며 주님을 섬기면, 나는 평화의 천사이자 진리의 전도사가 될 것입니다.
3. 그러므로 나는 주님을 믿겠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디에 있든 나는 결코 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병에 걸렸다면, 그 병이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 난처함에도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슬픔 속에 있다면, 내 슬픔 속에서도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헛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연장하거나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를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오 야훼여, 이스라엘의 주님이시여, 양떼처럼 요셉을 인도하시는 주님, 오 엠마누엘이여, 오 지혜의 주님이시여, 나는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칩니다. 나는 주님을 완전히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현명하시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 안에 있는 주님의 높은 뜻을 성취하게 하소서.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 일하소서. 나는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저를 당신의 눈먼 도구로 써 주소서. 나는 보지 않기를 청하고, 알지 않기를 청하며, 단지 사용되기를 청합니다.[19]
참조 문헌
1.www.lifesitenews.com/opinion/pope-francis-communion-adulterers-magisterium/
2. Infiltration: The Plot to Destroy the Church from Within by Taylor Marshall: amazon.com/Infiltration-Plot-Destroy-Church-
4. Online book at: archive.org/details/GoodbyeGoodMenByMichaelS.Rose/page/n5/mode/2up
5. Sacrosanctum Concilium Turns 60: onepeterfive.com/sacrosanctum-concilium-60/
6. triumphcommunications.net/9indefenseofmalachimartin.html
7. onepeterfive.com/on-the-modes-of-exercise-of-the-magisterium-part-ii-evaluating-amoris-laetitia/
8. vatican.va/content/paul-vi/en/encyclicals/documents/hf_p-vi_enc_25071968_humanae-vitae.html
9. eppc.org/publication/the-truce-of-1968-once-again/
10. catholicinsight.com/the-woeful-wages-of-the-winnipeg-statement/
11. www.lifesitenews.com/blogs/new-book-suggests-st-gallen-mafia-agreement-may-have-led-to-pope-benedict-xvis-resignation/
12. 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documents/rc_con_cfaith_doc_20030731_homosexual-unions_en.html
14-16. 마태오 10:14-16, 열 두 제자의 파견
“어디서든지 너희를 받아 들이지도 않고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도시를 떠날 때에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심판 날이 오면 소돔과 고모라 땅이 오히려 그 도시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17. Entitled Che cos’e il Cristianesimo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의 이 책은 베네딕토 16세가 2013년 사임한 후 쓴 여러 개의 별도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명시적인 희망에 따라 그가 죽은 후에야 출판되었습니다. 책의 첫 페이지에 언급된 바와 같이, 고 베네딕토 교황은 문서를 편집한 엘리오 게리에로(Elio Guerriero)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독일에서 나에게 반대하는 집단의 분노는 너무 강해서 내가 어떤 말을 하면 즉시 살인적인 소란을 불러일으킵니다. 나는 나 자신과 교회 세계를 보호하고 싶습니다.”
lifesitenews.com/news/pope-benedicts-republished-2019-essay-on-sex-abuse-at-center-of-attention-in-posthumous-book/
18. liturgies.net/saints/janefrancesdechantal/readings.htm
19. newmanreader.org/works/meditations/meditations9.html
지시를 왜곡하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선한 마음으로 시작된 잘못으로 인해 세상에 나타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과 지시를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자신에게 맞게 왜곡하여 자신의 성경을 만들어 읽고 있구나.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한 변명을 찾기 위해 성경을 비틀고 있구나.”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예수님, 1985. 7. 1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
- 마태오 10:32-33
로마가 적 그리스도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너희 세상의 인간들은 하나의 세계 정부와 하나의 세계 종교를 만들려 성자를 치워버리고 있구나. 슬프구나, 내가 전부터 너희에게 울부짖으며 말하지 않았더냐. 지금 기도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666이 영원한 신의 도시 로마에 스며들 것이며, 로마를 자신의 무리로 채울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양심과 눈을 가로막고 있는 장막을 거두거라.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녕 모르겠느냐?
“나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의 자녀들아, 성자의 교회를 구할 것을 너희에게 지시한다. 너희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나의 자녀들아, 기도하여라. 너희는 사탄과 그의 무리들을 신뢰하지 말아라. 이 영들의 전쟁에서 다른 이가 너를 대신해줄 것이라 기대하지 말아라. 양심을 아는 나이가 된 모든 이들은 진리와 빛의 전달자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의 자녀들아, 옛 예언자들이 말하고 적은 그날이 바로 지금이다.”
- 베이사이드 메시지 중
로사리오의 성모님, 1977. 12. 7
번역: 성미카엘회 회장 송 바울라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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